HOME | Contact Us
    자유게시판
    종회활동
    동영상자료
    사진 자료
    자 료 실
방문자
655
1,276
3,628
750,240
 
>>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작성일 : 07-02-02 17:37

안김 원로 서예가(여초) 별세
 글쓴이 : 양동
조회 : 1,812  

‘서성’으로 불린 20세기 한국서예 최고봉

1일 별세한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80) 선생은 한국 서단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21세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힌다. 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동생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과 함께 형제 서예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중국에서 전해 온 모든 서예의 장점을 흡수하고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와 같은 모든 서체들을 연습해 그 정화(精華)를 흡수한 뒤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결성된 ‘동방연서회’를 중심으로 펼쳐 온 그의 필치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초는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월간 ‘서법예술’을 창간하는 등 서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4년엔 전 10권 분량의 방대한 서예 교본인 ‘동방서범(東方書範)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동양 서법사의 대표적인 문헌과 금석문 중에서 각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만 골라 직접 글씨를 썼다. 동방 서체의 백미로 꼽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수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문 일부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게 있어 고심 끝에 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서예 철학은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루면서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서예란 모범이 되는 글씨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법첩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 거기 비친 글자대로 붓질을 하는 과정을 선인들이 중시했던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은 초보자라도 근본은 생각하지 않고 덮어놓고 창작만 하려 하니 큰일”이라 한탄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 큰 시련이 닥친 것은 지난 1999년 5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오른쪽 손목 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매일같이 붓을 들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좌수(왼손)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설악산에서 3개월을 단련한 끝에 잔 기교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경지를 보였다. 이후 오른손은 완치됐기 때문에 그의 왼손 글씨는 2000년 6월 단 한 번의 전시회로 끝났다.
1993년부터 설악산에 머물면서 창작 활동을 해 왔던 그는 2004년 건강 악화로 붓을 놓기 직전까지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2월 ‘여초 김응현 작품 개인소장품’ 전시 참석을 위해 조선일보 미술관에 들른 그는 자신의 작품 117점을 둘러보며 “그 동안 내 업적에 의문이 많았는데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친형인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형년(동방연서회 상임이사),항년(사업),남희(부산외대교수),주희 등 2남3녀. 빈소는 서울대병원,발인은 3일 오전 9시(02-2072-2016).

김덕년 07-08-02 17:49
답변 삭제  
여초선생님의 이승을 떠나심을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몇번에 걸쳐 인사를 드리고
많은 만남과 가르치심을 받고자 하였으나
길지않은 인생의 마지막길에
많은 배움을 받고
빈소도 찾지 못하고
나중에야 소식을 듣고 마냥 애도만을 드릴 뿐입니다.
어르신의
마지막
글을 저에게 남겨주심에
저의 가보로 모실 것입니다
삼당공 할배의 글과 임금의 옥새에 새겨진 글을
마지막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저는
삼당공할배 ~~ 태(승의랑공) 할배의 후손입니다.
종종 휴암공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것은
저의 선친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난고할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휴암공파의 홈페이지가 늘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숨쉰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삼척에서 덕년(해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