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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8-05 22:18

해명을 부탁드립니다(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글쓴이 : 김덕년
조회 : 1,840  
  •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
  •  
  • 삥꽁이(o3***)  1:1질문하기
  • 조회 5246  2007-10-16 19:47
  •  

 김두한의 아버지가 김좌진이 아니라는 건 최근 역사학계의 상식이다.
 
 김두한이 스스로 말하길:
 
 "나의 조부는 고균 김옥균이다. 나의 부친은 백야 김좌진이다. 나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안동김씨의 서족이다.", "내가 일곱살때 세계전사상 희귀한 청산리대첩이 있자 일경은 즉각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살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듣고 울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는 친손이 없었다. 설사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 주장한다 해도 문제는 그러한 근거가 현재 그 어디에도 있질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청산리대첩이 1920년에 일어났고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다. 김두한은 1918년생이라고 알려졌는데 만약 이것이 정확한 것이라면 청산리대첩이 일어날 당시 김두한은 일곱살이 아니라 세살이어야 한다. 더 웃긴 건 그로부터 3년뒤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울었다는 김두한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김두한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 김좌진은 청산리대첩이 일어난 해로부터 10년뒤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과연 김두한어린이는 새파랗게 살아있는 김좌진장군님이 7년뒤에 죽을 거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언이라도 할 수 있는 무당이 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단순한 깡패가 아니라 신내림을 받은 "무당깡패"였던 것일까? 
 
 결국 이러한 것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직한 사실은 김두한이 자신의 삶을 날조했으며, 그것마저 치밀하게 하지도 못하고 매우 허술하게 날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날조를 통해 스스로가 무식한 깡패라는 것을 전국민에게 드러내보인 꼴만 연출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두한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김두한의 삶에 대한 정보들가운데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만을 대강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일단 김두한은 개성에서 자라난, 자기 부모를 모르는 고아이다. 열살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왕초(王草, "왕초"[王초]란 거지들이 그들의 우두머리를 부를 때 썼던 일반명사일뿐이지 고유명사는 아니며, 지금까지도 "왕초노릇한다"라는 등의 말로 쓰이는 일반명사로 사전에 등록되어 있을뿐이다. 따라서 왕초라는 이름도 실제이름은 아닐 것이며, 그렇게 부르던 것이 그냥 이름으로 굳어져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는 거지우두머리에게 붙들려 장차구다리밑(현재의 청계천)의 거지소굴에서 컸다. 그런데 김두한은 보통 거지와는 다르게 선천적으로 싸움을 매우 잘 했고, 그의 싸움실력이란 조선의 태껸을 배운 것도 아니고 일본무술이나 중국무술을 배운 것도 아닌, 순 경험적으로 체득한 싸움실력이었다. 김두한과 나이가 다섯살정도의 차이로 비슷한 오오야마 마스타쯔, 우리가 흔히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도 알고 있는 최영의(1923년생)가 아홉살때부터 차비(?)라는 무술을 배우고 한 농꾼으로부터 소림무술을 배우다가 1937년 일본으로 가 오키나와에서 생겨난 무술인 카라테(카라테는 일본무술이 아님)를 배우면서 전문무술인으로서 싸움실력을 키워온 것과는 그런 면에서 매우 다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둘중에 어느 한쪽만이 훌륭하다고 하는 가치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어쨌든, 김두한은 그러한 탁월한 싸움실력하나로 거지로 출발하여 종로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겨우 열여섯살때부터 일경(일제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힌 것만은 사실이며, 그래서 삼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예비검속"(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에 삼년에 한번씩 꼭 시내의 여덟개 경찰서의 유치장을 돌아가면서 약 한달을 보내야만 했다. 이것을 당시 은어로 "통돌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이라는 것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김두한이 싸움실력으로 "일제에 격렬하게 투쟁"해서 요주의 인물이 되고 예비검속을 받아야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김두한은, 열여덟의 나이에 감옥에 갔다 나와 이름을 바꾸고 유격대에 숨어들어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과는 달리 어디로 숨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유관순처럼 죽지도 않았고, 그저 예비검속만 정기적으로 받으면 됐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가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냥 "깡패", 그것도 아주 "훌륭한 깡패"였기 때문에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비검속이라는 곤욕을 통해 나름의 호협심과 반일애국심을 키운 것만은 분명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국심이 있어도 깡패는 깡패인지라 무식한 두뇌에 뿌리를 뒀던 그의 애국심은 해방뒤 잘못 전도되어 자생적 민족세력의 어느 한 분파에 몸담고 있던 천삼백여명의 진정한 애국자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가엾은 철도파업간부 여덟명을 생매장하는 등─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김두한 스스로 한 말이다─ 이승만의 정치깡패로서 도살행위만를 일삼다가 시름시름 앓며 죽어가는 가련하고 한심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김두한이라는 한 인물의 대강적 정보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으로 우리가 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러한 허술한 김두한의 날조마저 눈감아주고 치켜세워주면서 국민들을 속여야만 했던 이승만 · 박정희정권(일본이나 중국만 역사왜곡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역사왜곡을 실컷 해먹고 또 해먹은 나라다)의 추악한 실상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김두한의 삶을 날조하는데 공범자노릇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고작 그를 정치깡패로써 이용해먹어 국민들을 때려잡고 반대세력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이승만노망여우, 박정희대일본제국육군소위의 명맥을 이어받아 전두환대머리새끼가 광주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러한 아픈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일뿐이며─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아픔이란 겪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역사도 발전하는 것이다. 북의 경우 그러한 아픔을 겪지 않고 너무도 빨리 훌륭하게 친일세력들을 청산했다는 데에 오늘날의 경직된 모습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대선후보에 당선되자 마자 전두환이나 찾아가서 알랑방귀나 뀌고 앉아있는 놈이 경제대통령이라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확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주체적이지 못하고 외세에만 의존해야만 했던 명분없는 그들의 독재정권의 실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김두한이라는 한 가련한 고아 · 거지 · 깡패의 삶을 산 인물만을 보아도 그 대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네이버지식인의 오픈백과에 써서 올리려 하였다. 하지만 네이버는 자신들의 "등록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글을 올리지 않았다. 과연 그 등록기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의 언론검열이 떠오를 뿐이다. 새로운 생각, 비록 그것이 자신이 여태까지 알고 의심치 않고 믿어왔던 지식을 허물어뜨린다 하더라도 네이버와 같은 거대한 포털사이트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지식의 운영은 그것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점 막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컴퓨터 좀 할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운영자 스스로가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가 되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네이버란 거의 완벽하게 누리꾼들의 자생적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사이트가 아니던가? 그러한 누리꾼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사이트가 스스로 누리꾼들의 생각과 주장을 검열하고 삭제시킨다면 결국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누리꾼에 의해 그들은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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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나 두한 대부님께서는 그 당시 어린나이 이시거나

청산리전투가 일어나고

좌진 할배께서 똘아가신 해를 잘 모르셔서 한 말씀이기도 하겠지만

해명은 있어야겠기에

1984년(갑자보)에 출간된 대동보 제5권 1177페이지와1537페이지(계권파-문충공 상용파)를 보면 문충공이신 선원(상용)할배의 11대손이신 것은 분명한데

동 대동보 제 5권의 1056페이지의 옥균할배의 친손자는 아닙니다

어떻게 해명하여야 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