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려일소 (百慮一掃)

 사람 간 접촉이 줄며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가난한 서생의 적막한 시간 사이를 엿보며 놀았다.

 "妄想走作時(망상주작시)  망상(妄想)이 내달릴 때

  仰看無雲之天色(앙간무운지천색)  구름 없는 하늘빛을 올려다보면

  百慮一掃(백려일소)  온갖 생각이 단번에 사라진다.

  以其正氣故也(이기정기고야)  그것이 바른 기운이기 때문이다.

  且精神好時(차정신호시)  또 정신이 좋을 때

  一花一草一石一水일화일초일석일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바위 하나, 물 하나,

  一禽一魚靜觀(일금일어정관)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를 가만히 살피노라면

  則胷中烟勃雲蓊(즉흉중연발운옹)  가슴속에서 연기가 피어나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若有欣然自得者(약유흔연자득자)  흔연히 자득함이 있는 것만 같다.

  復理會自得處(복리회자득처)  다시금 자득한 것이 뭘까 하고 따져보면

  則却茫然矣(즉각망연의)  도리어 아득해진다."

 끝 간데없는 망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의 바른 기운으로 멈춰 세운다.

 자연의 사물을 찬찬히 관찰할 때면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있다.

 이치로 따져 알기는 어렵다.

 "煩惱時(번뇌시)  번뇌스러울 때

  闔眼坐(합안좌)  눈을 감고 앉으면

  睛瞙之間(정막지간)  눈동자와 각막 사이가

  作一着色世界(작일착색세계)  하나로 착색된 세계가 된다.

  丹綠玄素(단록현소)  붉고 푸르고 검고 흰 빛깔들이

  煜流蕩(욱류탕)  환하게 반짝이며 흘러가서

  不可以名(불가이명)  무어라 이름 지을 수가 없다.

  一轉而爲勃勃之雲(일전이위발발지運)  한 차례 바뀌어 피어나는 구름이 되고,

  又一轉而爲瑟瑟之波(우일전이위슬슬지파)  또 한 번 바뀌어 출렁이는 물결이 된다.

  又一轉而爲纈錦(우일전이위힐금)  다시 한 번 바뀌면 아롱진 비단이 되기도 하고

  又一轉而爲碎花(우일전이위쇄화)  어느새 부서진 꽃잎으로 변한다.

  有時而珠閃(유시이주섬)  어떤 때는 구슬처럼 반짝이고,

  有時而粟播(유시이속파)  어떤 때는 낱알이 흩어지는 듯하다.

  變沒須臾(변몰수유)  잠깐 사이에 변했다 사라져서,

  局局生新(국국생신)  그때마다 새로움이 생겨나니

  足可銷一塲繁憂(족가소일장번우)  한바탕 번다한 근심을 해소하기에 넉넉하다."

 두서없는 근심에 마음이 시달릴 때, 그는 눈을 감고 만화경같이 바뀌는 햇살의 장난에 마음을 싣곤 했다.

 또

 "邃洞幽蛛虛自裊(수동유주허자뇨)  깊은 동굴 숨은 거미 혼자서 줄을 감고,

  黃牛聽雨角崢嶸(황우청우각쟁영)  황소는 빗소리 듣느라 뿔이 쫑긋 솟았네"

  와 같은 시를 읽다가는, 빈 동굴의 거미 다리가 허공을 헛놀 때와 비가 오는 쪽으로 솟는 소뿔을 떠올리며, 그 적막하고 막막하던 시간을 견뎠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