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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10 09:18
[방조] 13세 방조 訥齋公 生溟 (눌재공 생명)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891  


       
                    눌재공 생명

                     (訥齋公 生溟)

공(公)의 자는 사호(士浩), 호는 눌재(訥齋) 연산군 10년(1504) 갑자 정월 7일에 출생하였다.

현조는 합문봉례공[(閤門奉禮公) 통사랑 합문봉례 혁(革)]이고, 고조는 비안공[(比安公) 선교랑 비안현감 삼근(三近)]이며, 증조는 판관공[(判官公) 한성부 판관 계권(係權)]이니, 할아버지는 장령공[(掌令公) 사헌부 장령 영수(永銖)]이요, 아버지는 절도사공[(節度事公) 형조 좌랑 경상 절도사 순(珣)과 어머니 상락김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사직서령(社稷署令) 생하(生河)의 동생이다.

예안에 거주하였고 태어났을 때 근골과 상이 특이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위중하였다.

중종 29년(1534) 갑오 3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 《심경》과 《계몽편》 등의 책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어려운 걸 물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말을 조심하고 독실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보고 그가 지내는 재를 눌재(訥齋)라고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였으니 어찌 빈한한 것을 근심하리요.” 하고 노년에는 정사를 지어 글 쓰고 쉬는 곳으로 삼았다. 관직은 참봉에 이르렀다.

선조 10년(1577) 정축 12월 30일 향년 74세에 졸하였다.

마곡사(麻谷祠)에 흠향되었다.

배위(配位)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생년월일은 미상이고, 선조 11년(1578) 무인 5월 일에 졸하였다. 아버지는 참봉 효검(孝儉)이고, 할아버지는 교위 근(瑾)이며, 증조는 생원 청원(淸遠)이니, 외조는 진사 민소(閔紹)로 본관은 여흥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니, 1남은 선교랑 청암(淸菴) 현(顯)이고, 2남은 건원릉 참봉 신암(愼菴) 부(頫)이며, 1녀는 첨지중추부사 황기(黃琦)로 창원인이니, 2녀는 김언진(金彦璡)으로 광산인이다.

묘소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동 오륜곡 신좌을향(辛坐乙向 : 동남향)에 있고 묘갈은 종후손(從後孫) 보국 성근(聲根)이 찬하였다.

[參考文獻] 嶺南人物考 安東金氏世譜 陶山及門諸賢錄 安東金氏世譜

눌재(訥齋)선생문집 해제

 

1. 머리에

공은 인(仁)에 가까운 자질로 오로지 그 근본을 밝히는데 힘쓰는 학문으로 깊이 함양하고 독실하게 실천해서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노력하였다고 평가를 받았으니 상당량의 유고가 남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아쉽게도 유고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성의 있는 후손들이 경향 각지를 다니면서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 1902년 (광무 6년) 에 『눌재선생문집(訥齋先生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한글 세대로 바뀌자 젊은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문집 내용을 보면 시(詩)가 14수, 서(書)가 2편, 제문(祭文) 2편, 잠(箴)이 5편, 잡저(雜著)가 2편이 실렸고 부록으로 눌재 선생 세계도, 눌재 선생 연보가 실려 있다.

이번 이 번역 문집은 공의 19대 손 형진(兄鎭) 회장의 효성으로 간행되는 것이다.

 

2. 저자의 가계와 생애(生涯)

(1) 가계(家系)

저자의 휘(諱)는 생명(生溟), 자는 사호(士浩), 호는 눌재(訥齋)이다. 공이 일찍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하에 나아가 선생을 만났을때 “인(仁)에 가까운 자질이 참으로 군자답다󰡓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어눌하다 하여 세칭 눌재선생이라 불렸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시조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의 왕자로 26세 때 당시 중진(重鎭)이였던 고창(古昌 ; 지금 안동시) 성주(城主)로 있었는데 후백제 견훤의 침입을 받아 어려움에 처했을 때 향민을 거느리고 고려군과 함께 견훤군을 크게 물리쳐서 고려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워서 고려개국공신에 책록되어 고려 태조로 부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 아부(亞父)의 벼슬을 받은 휘 선평(宣平)이다. 고창성주로 있었던 관계로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그 뒤 여러 대가 실전되어 중간 세계는 알 수 없고 고려때 공수부정(公須副正)을 지낸 휘 습돈(習敦)을 일세(一世)로 삼는다. 공은 호장(戶長) 휘 여기(呂基)를 낳고, 호장공은 호장정위(戶長正位) 휘 남수(南秀)를 낳고, 호장정위공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判圖判書) 휘 희(熙)를 낳았으며, 판서공은 승사랑(升仕郞)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 휘 자(資)를 낳았고, 위위주부동정공은 정의대부(正義大夫)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휘 근중(斤重)을 낳았으며, 판예빈시사공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정(典農正) 휘 득우(得雨)를 낳았고, 전농정공은 통사랑(通仕郞) 합문봉례랑(閤門奉禮郞) 휘 혁(革)을 낳았다. 이가 곧 공의 5대조이다.

고조 휘는 삼근(三近)이며 조선 세조 계해년(癸亥年 : 144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으며 금산(金山 : 지금 素山)에 기거하면서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증조 휘는 계권(係權)인데 처음으로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학조(學祖 : 道號 燈谷)이다. 출가하여 세조때 국사(國師)가 되었고, 둘째 아들 휘 영전(永銓)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으며, 셋째아들 휘 영윤(永勻)은 진사이고, 넷째아들 휘 영추(永錘)는 문과 급제하여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다섯째 아들 휘 영수(永銖)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이가 곧 공의 조부이다. 장령공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휘 영(瑛)은 호를 삼당(三塘)이라 하였으며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 급제후 여러 관직을 거처 이조(吏曹) 참의(參議)를 역임하였으며 둘째아들 휘 번(璠)은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냈다. 셋째 아들 휘 순(珣)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이 도사공이 곧 공의 아버지이다.

 

(2) 생애

공은 연산군 10년 (1504) 정월 7일 안동부(安東府) 서쪽에 있는 풍산현(豊山縣) 소산리(素山里) 본제(本第)에서 태어 나서 선조 10년 (1577) 12월 30일 서세하니 향년 74세 이였다

공은 골상이 영수(英秀)하고 안채가 명랑(明朗) 하였다. 공의 백부 삼당(三塘 :金瑛)선생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였다. 공이 3세 되던 해(중종 원년 : 1506) 모부인 상락김씨(上洛金氏)가 종기로 고생을 하자 공께서 크게 울며 젖을 빨려 하지 않았다. 공은 6세때( 중종 4년 : 1509) 백부 삼당공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명봉재수(鳴鳳在樹 : 봉황은 나무위에서 운다)란 구절에서 그 나무에 대하여 묻자 즉답으로 “그 나무는 오동나무나 대나무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친 진사공도 “이 아이는 타고난 자질이 영오(潁悟)하니 우리 가문의 희망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공 7세 되던 해(중종 5년 : 1510) 모부인을 따라 의성 사촌(沙村)에 가서 외조부 송은공(松隱公 : 金光粹 進士)에게 『효경(孝經)』을 배웠다.

공 16세 되던 해(중종 14년 : 1519) 미산재(渼山齋: 판관공이 지은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하였다.

공 20세 되던 해(중종 18년 : 1523) 초계 변씨(草溪卞氏 : 司諫 季孫의 증손녀요 參奉孝儉의 女이다) 와 결혼하였다.

공 21세 되던 해(중종 19년 : 1524) 우산재(于山齋)에서 『주역』을 읽었다. 이 때부터 부모님 문안 외에는 차분히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공 29세 되던 해(중종 27년 : 1532) 8월 중부(仲父) 서윤공(庶尹公 : 金璠)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집안 식구들과 같이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 31세(중종 29 : 1534) 봄에 향시에 합격 하고 그 해 9월에 사마시에 합격한뒤 태학(太學 : 成均館)에 유학하였다. 이 때 『주자서(朱子書)』를 읽고 “공부 하는 이의 마음을 가다듬는 것, 도를 닦는 태도 , 옳은 일을 하는 방도가 여기 있다”고 하였다.

공 32세(중종 30년 : 1535) 정월 아버지 진사 공의 상을 당하여 시묘 살이를 시작하여 35세 가 되던 해(중종 33년 : 1538) 3월 탈상 하였다. 그 해 가을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어 여주를 지나다가 이호촌(梨湖村)에 살고 있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을 찾아뵙고 군자의 입신하는 도리를 배웠다.

공 39세 되던 해(중종34 : 1541) 5월에 모부인 상락김씨 상을 당하여 애훼불극타가 공 38세 되던 해 (중종 36년 : 1541) 7월에 탈상하였다.

공 39세 되던 해(중종 37년 : 1542) 예안현 서촌(西村)으로 이사하였다.

공 40세 되던 해(중종 38년 : 1543) 예안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선생을 뵌 뒤 선생님으로 모셨다. 공께서 서촌으로 옮기신 것도 퇴계선생의 학문을 전수 받기에 편리함 때문이였다. 공의 말씨가 어눌하였는데 퇴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에 가까운 자질이 참으로 군자답다.”라 하였다. 그날 이후 퇴계선생의 극진한 가르침과 벗들과의 강론을 통하여 학문연마에 정진하였다. 그해 여름 선교랑(宣敎郞)으로 승진하고, 가을에 경산훈도(慶山訓導)에 제수되었다. 그 해에 예안훈도로 자리를 옮겼다.

공 41세 되던 해(중종 39년 : 1544) 2월에는 향교에서 석채례(釋菜禮)를 행한 뒤에 제생(諸生)들에게 『소학(小學)』과 『중용(中庸)』 등을 강론하였다.

공 42세 되던 해(인종원년 : 1545) 7월 인종이 승하 하고 10월 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도암(道巖)에 정사(精舍)를 짓고 수신과 학문에 전심하였다.

공 43세에는(명종 원년 : 1546) 「원조사잠(元朝四箴)」을 지었으며, 2월 동문들과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향교에서 강론하였다.

공 50세 되던 해(명종 8년 : 1553)에 묵재(黙齋) 박사희(朴士熹)와 함께 매균정(梅筠亭)을 짓고 함께 거처하며 「태극도설의의(太極圖設疑義)」를 가지고 공부하였다.

공 54세 되던 해(명종 12년 : 1557) 박묵재와 매균정에서 『주서절요(朱書節要)』를 강독하였다.

공 59세 되던 해(명종 17년 : 1562) 3월 도산으로 가서 이구암(李龜巖) 정(楨)과 함께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강론하였다.

공 67세 되던 해(선조 3년 : 1570) 12월 퇴계선생이 서세하자 애통해하며 흰 옷을 입고 심상(心喪) 1년을 보내었다.

공 73세가 되던 해(선조 9년 : 1576) 9월 정사에 제상들을 모아 성리서(性理書)를 강론하였다. 신병이 깊었으나 강론을 계속하다가 공이 74세 되던 해(宣祖 10年 : 1577) 12월 30일 자손들에게 근검과 효제로 본을 삼고 청백(淸白)을 보물삼아서 선대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후세에 법으로 삼도록 하라는 훈계를 내리고 영면하였다.

장례는 그 다음해(선조 11년 : 1578) 3월 오륜동(五倫洞) 신좌(辛坐)에 장사지냈다.

 

3. 내용

문집구성을 보면 권 1에는 시, 편지, 제문, 잠언, 잡저가 실려 있고 권 2에는 행장 등 공의 저술이 아닌 공에 대한 다른 분들의 각종 글이 실려 있다.

권 1의 내용을 부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詩)

시는 모두 19편이 실려 있는데 5언(五言) 장단구(長短句)가 8편, 7언(七言) 장단구가 11편이다.

조선시대에도 소동파의 시가 전범이 되어 많이 읽혀졌다. 소식의 문장은 시격은 지용(智勇)이 비범하여 상쾌하고 명랑하며 또 시문의 변화가 생동하고 웅장하며 구름이 떠돌며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전개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퇴고하여 분칠한 흔적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시풍에다가 성리학이 국가의 학이 되면서 그 영향을 받은 그런 시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공의 시문도 예외는 아닌듯하다.

공은 위로는 퇴계 이선생의 가르침과 횡으로 박묵재(朴黙齋: 諱: 士熹)와 같은 뜻이 맞는 분이 있어서 서계촌(西溪村)에 매균정(梅筠亭)을 짓고 도(道)를 강론하면서 전심(專心)하여 공부하였다. 퇴계선생도 이 곳을 다녀가서 두 분의 갸륵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태도를 보시고 장려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그대들의 경책이 시구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겠고 知君警策存詩句

매화와 대나무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구나 說着梅筠待我來

 

공은 중년 이후 심학(心學)에 전념하여 스승의 가르침과 현사(賢士)들과의 논의를 통하여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주경(主敬)과 존성(存誠)의 노력이 동(動)과 정(靜)을 겸하고 본(本)과 말(末)을 갖추어서 정밀(精密)하고 상세(詳細)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은연중, 시문 중에 성리학의 영향이 스며있다. 「오천(烏川)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생각하면서」라는 칠언율시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해외의 이름난 현사들은 일찍이 들은 바가 있지만 海外名賢夙有聞

우리나라에서는 선생이 처음으로 사문을 천명하였소 先生始出闡斯文

성리의 근원을 소급하여 그 맥을 전하였음을 溯源性理能傳脈

시문으로 지으니 진정한 향기 뿜어나네 立語詩章正吐芬

왕명을 받아 일본에 가서 출절을 드러냈고 日域奉綸褒直節

중국에 가서도 명대로 응대하여 공훈을 표출하였지 天廷對命表忠勳

오천의 이 날이 정말 추모할 날이구려 烏川此日堪追慕

만고의 강상이 밝기가 아침 햇살과 같구나 萬古綱常明若昕

또 독서와 수신을 통하여 마음에 가식이 없는 진정성도 엿볼 수 있다. 여러 편 중에서 스승 퇴계선생이 서세하였을 때 쓴 만사(輓詞)에서 그 마음의 근저를 알아볼 수 있다.

 

백약이 다 무효이니 이제 더 어이할 수 없네 百藥難成己矣哉

어째서 조물주는 이리도 시기가 많은고 如何造物謾多猜

나라가 원귀를 잃음을 애통해 하거니 國家爲慟元龜喪

고을사람 다함께 태악이 무너짐을 애통해 하는구나 鄕邑同傷太岳摧

소자가 모르는 것 누구에게 물어보며 小子稽疑何問業

제생들의 시예를 어느 누가 가릴것인가 諸生試藝孰掄才

염․락․관․민의 학문에 잠심하려해도 潛心濂洛關閩學

후학을 계도할 인물이 없으니 애석하고 애석하다오 可惜無人啓後來

 

다음에 한편 한편을 살펴보겠다. 그중 맨 처음 나오는 「회포를 진술하다(述懷)」라는 시는 오언 장구인데 두자미(杜子美)의 「북정(北征)」에서 운(韻)을 따서 지었는데 모두 140구의 장시이며 본인의 평생을 시로 엮은 것이다. 「도정절(陶靖節)의 사시음(四時吟)에 차운(次韻)을 하다」, 「가을 밤에 읊다」, 「늦은 봄에 여러 벗들과 그리고 종제 생해(生海)와 함께 송라산(松羅山)에 놀러가다」, 「용수사(龍壽寺)에 자면서」 등은 풍광을 읊은 것이며, 「유소사(有所思)」,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읊다」라는 시는 자기 자신의 상념을 읊은 것이다. 또 「황임로 원조(元兆)에게 주다」, 「김백영 부인(富仁)과 김돈서 부륜(富倫)에게 지어주다」와 같이 다른 이에게 시를 지어 보낸 것이 있는가 하면, 선현들을 공경하여 쓴 시도 몇 편 있다. 「오천에서 포은선생을 생각하면서」, 「회재선생의 <소봉대>란 시에 공경하여 차운하다」, 「퇴계 선생의 <야당(野塘)>이란 시에 차운하다」가 그 것이다. 또 이굉중(李宏仲: 德弘)의 동도(東都: 慶州)란 시(월성, 불국사, 이견대, 소금가마, 소봉대, 감포)에 차운을 하기도 하였고, 공의 스승 퇴계 선생의 서거에 애도하는 만사도 1편이 있다.

(2) 편지

간찰은 딱 2통이 남아 있다. 1통은 가까이 지내오던 김부인(金富仁: 자는 伯榮)과 김부륜(金富倫: 자는 惇敍)에게 방문날짜를 통보한 것이고 또 1통은 종질 극효(克孝: 자는 希閔, 호는 四味翁 敦寧都正)에게 편지받고 회답한 것이다. 편지글이 원만하고 긴절(緊切)해서 장족의 발전이 있을 기미가 보이며 글씨 또한 해정(楷正)하고 정수(精粹)하다고 찬사를 보내고 성현의 교훈으로 말하면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이 모두 오묘한 도리와 정밀한 의리가 담겨 있으니 그것을 읽으라는 당부와 예서에 대한 질문에는 별지에 써서 보내니 읽어보라는 내용으로 당내의 어른으로써 도리를 다한 글이다.

 

(3) 제문(祭文)

제문도 단 2편이 남아 있다. 한 편은 선사(先師) 퇴계 선생을 제사하는 글인데 박사희(朴士熹)와 연명(聯名)으로 쓴 제문이다. 선사의 덕과 학문을 기리고 살아생전의 행의를 찬양하고 명복을 비는 정감이 넘치는 글이다.

또 한 편은 백부 삼당공(三塘公: 휘 瑛)을 제사하는 제문이다. 살아생전의 행의와 교유가 타의 모범이 되셨으며 돌아가실 무렵 선업을 계승하여 완성하라는 말씀을 명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4) 잠언

어느 해 설날 아침에 남기신 잠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네 가지 잠언을 남기셨다. 첫째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둘째는 정심(正心)과 수심(修心), 셋째는 납언신행(納言愼行: 조심스런 말과 신중한 행동), 넷째는 제가치국(齊家治國)에 대한 잠언이었다.

 

(5) 잡저(雜著)

「생각을 위주로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훈계의 말」 두 편이 있다.

 

권2 부록(附錄)

「사문의 기증(師門寄贈」과 이종제 류운룡(柳雲龍)이 쓴 「행장(行狀)」, 이중린(李中麟)이 쓴 「묘지명」, 종후손(從後孫) 성근(聲根)이 쓴 「묘갈명」, 금우렬(琴佑烈)이 쓴 「명(銘)」, 김도화(金道和)가 쓴 「도암정사기(道巖精舍記)」, 류동준(柳東濬)이 쓴 「도암정사중수상량문(道巖精舍重修上樑文)」, 류필영(柳必永)이 쓴 「유허비명병서(遺墟碑銘幷序)」, 강순원(姜舜元)이 쓴 「매균정중건기(梅筠亭重建記)」, 「도산급문록(陶山及門錄)」, 종후손 병국(炳國)이 쓴 「가학연원전(家學淵源傳)」, 공 10대손 호근(好根)이 쓴 「마곡서원사적(磨谷書院事蹟)」, 공에 대한 「선성읍지(宣城邑誌)」 기록, 「마곡산수지(磨谷山水誌)」, 이사우(李師愚)가 쓴 「숭현사이건상량문(崇賢祠移建上樑文)」, 집의(執義) 이급(李級)의 「봉안문(奉安文)」, 도정(都正) 류규(柳奎)의 「이안시고유문(移安時告由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이휘녕(李彙寧)의 「서원승격시 고유문」, 종후손 가진(嘉鎭)의 「후서(後叙)」, 김경식(金敬植)의 「후서」, 권상익(權相翊)의 「발문(跋文)」, 10대손 택근(澤根)의 「발문」, 11대손 병현(炳玹)의 「발문」, 종후손 용규(龍圭)의 「발문」, 12대손 낙규(洛圭)의 「발문」이 실려있다. 이는 공에 대한 글일 뿐 공의 저작이 아니므로 참고하고자 부록에 넣었음이다.

 

4. 맺는 말

이상과 같이 공의 문집을 살펴보았다. 그리 많지 않은 시문, 편지, 제문, 잠언, 잡저를 통해서도 빈빈(彬彬)한 문체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문학의 일면을 살필 수 있었고, 편지나 잠언 등에서도 공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진덕수업(進德修業)을 위하여 퇴계 선생을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매균정(梅筠亭)을 짓고 박묵재(朴黙齋)와 「태극도설의의」, 『주자절요』, 『성리서』 등을 강론하면서 수도(修道)에 더욱 정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향교에 나가서 『소학』, 『중용』, 『심경』, 『근사록』 등도 강론하였다.

가학(家學)도 이어 받았는데 판관공(判官公), 정헌공(定獻公)이 모두 덕망과 학문, 그리고 의리(義理)의 실천으로 저명한 분들이고 삼당공, 서윤공, 진사공도 덕망과 학문이 뛰어난 분들이다. 진사공은 공의 아버지이고 삼당공과 서윤공은 공의 백숙부(伯叔父)이다. 직간접으로 가학을 물려받아 공의 아들, 손자, 종자종손의 반열에 신암(愼庵), 창균(蒼筠), 구전(苟全), 학산(鶴山), 선원(仙源), 청음(淸陰), 구재(鳩齋), 부훤(負暄)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박학비재(薄學非才)한 후생이 공 19대손 형진(兄鎭) 회장의 누차 강권에 거절못하고 외람되게 해제를 집필할 것을 승낙하였으나 공의 심오한 학문과 고고한 덕행을 제대로 천양(闡揚)치 못하여 송괴(悚愧)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집이 사문(斯文)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믿으며 이 문집을 통하여 눌제 선생의 위치가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서력기원 2009년 11월 11일

                                                  족후손 위현(渭顯)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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