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그러한 꼴을 바라보다가 씁쓸히 웃고는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출입문은 들어 올 때와 달리 저승 문턱은 질서가 있었다.

그러나 출입문 안팎으로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얼룩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 아침의 불상사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는 양반이 되기 위한, 양반을 이어가기 위한 난장판의 잔해물이 아닌가.

과거시험장 밖은 더욱 허전했다.

이곳에도 술파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에 병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옆자리에서 시험을 보던 선비였다.

"아. 선비시구려. 답안지는 제출하였소이까?"

"네. 제출했습니다.
 선생님이 답안지를 던지고 급히 나가시는 바람에 잠시 망설이다가 저의 시조단자를 쓰고 일찍이 제출했습니다."

"잘했소이다. 하지만 막 쓴 글인데..."

"아닙니다.
 선생님의 글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달필입니다.
 아니 신필(神筆)입니다.
 오죽 했으면 제가 선생님의 글에 놀라 넋 없이 바라보다가 그만 시험감독관에게 걸려들지 않았습니까."

선비는 미소를 지으며 병연의 손을 잡고 점심식사와 술대접을 하겠노라고 굳이 이끌면서 한참을 걸어 나와 제법 큰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술을 겸한 국밥집은 제법 큰 편이었고, 주인에게 푸짐한 국밥 두 그릇과 인삼으로 담근 술을 시키니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선비는 방에 들어가 앉기가 바쁘게 말을 했다.

"선생님. 그 훌륭한 글을 쓰시고 왜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셨습니까?"

병연은 그의 물음에 말이 없었다.

실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기 떄문이다.

그는 이 순간을 빨리 벗어 나기 위하여 화두를 바꾸었다.

"참. 선비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는 충청도 청주에 사는 유성주(柳星柱)라 합니다."

"선친께선 지금 관직에 계신가요?"

"선친께선 모두 돌아가시고 아니 계십니다.
 생전에 아버님은 진사로 계셨고, 할아버님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계셨습니다."

정랑이라면 정5품의 관직을 말한다.

선비는 예조에서 근무한 분의 손자답게 그의 말과 행동에서 글을 읽은 선비로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제 말씀 드립니다만 아까 시험장에서 고반이라는 도장을 찍히고 나서는 앞이 깜깜했습니다.

딴에는 지금껏 과거 준비를 했습니다만 모두가 무너지는 절망뿐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선생님께서 답안을 다 쓰시고 다른 종이에 쓰시는 글을 보면서 선생님의 막힘없는 좋은 글을 보고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막 쓴 글인걸요. 그 글은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글로서 그저 써본 글입니다."

"아닙니다.

너무도 훌륭하신 글입니다.

선생님의 글은 저에게도 마음의 여유를 일러준 글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탐내면 마음 밖의 욕심입니다."

병연은 선비의 말을 듣고 내심 마음의 안도감을 갖게 했다.

만일 이 선비가 오늘의 과거시험에 급제하게 된다면 붕괴되어가는 이 시대에 사리사욕을 위하는 벼슬아치는 되지 않으리라 믿어졌기 때문에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는 오늘 자기가 쓴 글에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병연은 국밥 한 뚝배기를 다 들고, 따라놓은 술잔을 마저 비우고 나서 빈 잔을 소반 위에 내려놓고 선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빈부라는 글이 마음에 드셨단 말입니까?"

외람된 물음이었다.

"마음에 들다 뿐입니까. 오늘 선생님이 쓰신 모든 글이 다 명필이셨습니다."

"어허. 과찬이 심하십니다.

모처럼 좋은 음식과 좋은 술 잘 먹었소이다."

고기가 듬뿍 든 국밥과 좋은 인삼주를 서너 잔을 들이켰는지라 술기운이 돌았다.

병연은 옷소매로 입을 스치고 나서, 필낭을 뒤적이더니 시험장에서 써넣은 시를 꺼내어 선비 앞에 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