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선비께 드리오리다. 시라는 건 임자를 바로 만나야 글의 진가가 있는 것이지요..."

"이 귀한 글을 저에게..."

병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필낭을 챙기며 일어서려는데 선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존함? 이름 따위는 없소이다. 그저 김가라고 부르지요."

"그래도 오늘 선생님의 큰 글을 받았는데..."

큰 글이란, 오늘 과거장에서 써서 건 낸 시험답안지의 글을 말하는 것이다.

선비는 못내 아쉬워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허리춤에서 돈뭉치를 꺼내더니 병연에게 내민다.

"선생님. 이것만은 사양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의 글은 어디에 내놓으셔도 천 냥은 넘을 것입니다. 이 돈은 훨씬 못 미치지만 이백 냥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선비는 손에 쥐었던 돈뭉치를 병연에게 내밀었다. 이를 본 병연은 손바닥을 세워 밀어내며 거절했다.

"어허!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내가 이 돈을 받으면 과거장에서 글을 지어주고 팔아먹는 거벽 꼴이 되지 않소. 또한 선비께선 뇌물을 주는 격이고, 그렇게 되면 만일 선비께서 오늘 과거시험에서 등과되어 관직에 출사를 하게 된다면, 이 돈을 채우기 위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돈을 갈취할 것 아니겠소이까."

선비는 병연의 사리 있는 말에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실은 그의 말따나 지금 굶주림에 쓰러져 가는 시골농민이 수 없이 많음을 선비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권력 있는 자들의 수탈에서 비롯하는 것 아닌가.

"잘 먹었소이다. 우리가 인연이 있으면 어디서든 또 만나겠지요. 혹 그때 나에게 이름이 생겼다면 알려 드리겠소이다."

병연은 광통교 쪽으로 걸었다.

걸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이는 이년여 동안 지금까지 글공부를 같이 해 온 교우들에 대한 허전함이 아니었다.

폐족이 되면서 지금까지 치욕적인 고난을 겪으며 오늘 같은 날을 위해 글을 깨우쳐 주신 어머니에 대한 불효의 허전함이었다.

그러나 더 버티려 해도 불가항력이었다.

병연은 걸으면서 서편 중천에 떠있는 해를 처다 보았다.

한참을 걸어 청계천에 이르니 아낙네들이 물줄기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 소리가 메아리쳤다.

여인들이 빨고 있는 빨래감도 색깔이 두드러진 것이, 땀에 찌든 삼베옷의 시골 빨래와는 대조적이었다.

청계천 둑길을 걸어 한참만에야 광통교에 다다랐다.

그는 이 광통교를 함께 공부하는 벗들과 몇 번 지났지만 건널 때마다 다리의 사연을 되뇌이며 그냥 지나쳤는데 이참에 다리 밑의 교대석을 보기로 작정하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광통교는 태종(太宗)으로 등극한 이방원(李芳遠)이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을 도성 밖으로 내치고 방치해 두었던 신장석(神將石)을 이곳으로 옮겨 다리의 교대석(橋臺石)으로 사용했는데, 놀랍게도 다리 상판석을 바치고 있는 신장석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이성계(李成桂)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康) 씨와 생전에 정적관계에 있던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면서 의도적인 복수심으로 광통교의 교대석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신장석은 정교하게 다듬은 당초문양(唐草紋樣)과 구름문양의 조선 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오직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 할 신장석이 사백년(김병연 시대)이 넘도록 뭇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예상 밖의 결과가 놀라울 뿐이다.

"후~"

병연은 다리 밑에서 상판석의 버팀으로 이용한 신장석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그와 무관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의 굴곡을 새삼 느끼며, 오늘의 과거시험에서 쓸 수 없었던 사조단자에 꽉 막힌 자신과의 관계에 얽혀있는 긴 한숨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