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참만에야 다리 위로 올라왔다.

병연은 천천히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검푸르게 우뚝 솟은 삼각산, 북악산 인왕산, 그리고 머리 위로 보이는 남산이 어둠 속에서 평소와 달리 거대한 짐승들이 험상 사납게 서있는 듯했다.

내 마음이 약해진 탓일까.

병연은 어둠을 이용해 조용히 대문을 들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두루마기만 벗어 벽에 걸어 놓고 하인배들이 깔아놓은 이부자리 위에 벌렁 드러누워 생각 없이 천장만 멀건이 쳐다 보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개운치 않았다.

과거시험은 막힘없이 보았으나 자신의 명의로 제출치 못했음에서 오는 서글픔에서 오는 것일까.

병연은 그대로 누운 채 자신을 달래려고 눈을 감고 있으려니 문득 생각나는 글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한 여름날 술을 마시며 무한대로 붓을 휘둘러 쓴 하일대주(夏日對酒)라는 장편 시였다.

다산(茶山)은 강진으로 유배됐어도 나라와 헐벗은 백성들 걱정에 울화통이 치밀어 불합리한 신분제도와 과거제도, 소수 권세가의 독점에 대해 비판하며 간간히 술을 마셔가며 장장 1,060자의 기나긴 장편시를 썼다.

해마다 춘당대에서 과거시험 보이 것만

수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서 겨루니

눈 밝은 이루(離婁)가 백 명 있어도

낱낱이 감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붉은 색으로 멋대로 그어 버리고

오로지 당락(當落)은 시관 손에 달려 있네.

병연은 과거시험장에서 보았듯이 과거제도도 타락 할대로 쇠퇴되어 가고 있었다.

권세없는 자식이나 시골서 온 지식인들은 뒷전이고, 겨우 글자나 쓸 줄 알면 서울에 있는 권문세가의 어린놈은 장원 자리에 오른다.

권세도 당당한 수십 가문이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오면서

그들 중에서 붕당으로 서로 갈리어

죽기 살기로 서로 죽이고 물어뜯어

약한놈은 강자에게 먹혀

대여섯 집 살아남아 행세하는데

이자들이 경상(卿相)도 다 해먹고

이자들이 악목(岳牧)도 다 해먹고

이자들이 후설(喉舌)도 다 맡고

이자들이 이목(耳目)노릇도 다하고

이자들이 관직(官職)도 다 해먹고

이자들이 옥사(獄事)도 다스린다네.

약자는 강자의 쇠사슬에 얽매어 있는 게 현실이다.

만약 병연이 오늘 과거장에서 가명으로 사조단자를 써서 제출했다면 저 살벌한자들의 뒷조사에 걸려 무명가임이 밝혀질 게 뻔한 이치이고, 그 후론 세도 있는 강자에게 물어 뜯기어 만신창이가 될게 아닌가.

그렇다고 지난날 할아버지의 명함과 관직을 쓸 수는 없는 일이고.

병연은 다산의 장편시에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다음 구를 더듬었다.

가난한 농민이 아들 하나 낳아

빼어난 기품이 난곡(鸞鵠) 같아서

그 아이 팔 구세 자라니

의지가 가을 대나무 같아

아비 앞에 꿇어 앉아 여쭙기를

"제가 지금 구경(九經)을 다 읽고

경술(經術)이 천인(千人) 중 으뜸이오니

홍문록(弘文錄)에 오를 수 있겠지요."

그 애비가 하는 말이,

"너는 지체가 낮아서

임금을 가까이서 보좌할 수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