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이곳 서울을 떠나리라 마음을 굳히고 해장 신석우가 가져온 서파(西陂) 유희(柳禧)가 쓴 <문통(文通)>이라는 책이 마음에 들어 이를 탐독하느라 며칠을 더 머무르다가 떠나기 전날 2년여를 안응수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그가 쓴 글을 모아 단봇짐에 꾸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폐족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름은 김란(金鸞), 자는 이명(而鳴), 호는 지상(芷裳)으로, 사는 곳은 광주로 하여 지금까지 가명으로 버텨왔지만 폐족의 신분 앞에 그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병연은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어릴때 익혔던 공자의 글을 더듬었다.

萬事分已定(만사분이정)

浮生空自忙(부생공자망)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분수가 정해져 있는데

허공에 뜬 사람들은 헛되이 바쁘게 움직인다.

병연은 이 글을 외고 나서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다독였다.

다음날 아침 조반을 마치고 그동안 알뜰히 보살펴 준 복경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 동안 함께한 복경 안응수, 해장 신석우, 사수 신석희, 그리고 멀리서 온 우전 정현덕도 늦게나마 달려와 남산을 지나서까지 배웅하면서,

"선생님. 저의 문장을 다듬어 주신 선생님도 안계신데 저도 고향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고향?"

"네."

"자네만은 꼭 출사하기를 빌겠네."

병연이 이들과 헤어진 후 20여년이 지난 뒤 해장 신석우가 병연의 소식을 접하고 그와 20여 년 전 함께 교류를 가졌던 김삿갓임을 알고 그의 시문과 지식 재주를 회고한 글을 그의 문집인 해장집(海藏集)에 기록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관동지방을 왕래하면서 시를 짓는데 모두 기발하게 뛰어난 것이고 과체시에 더욱 정밀 공교하다.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기만 하면 문득 음식을 대접하고 머물러 묵게 하였다.

그들은 김삿갓에게 어려운 운과 생소한 글제를 주어 그를 시험하기도 했다.

아무리 어려운 운자를 써도 그 운이 타당하고 문장이 원활했다.

그래서 명성이 대단했는데, 다만 그는 성만 말할 뿐이고 삿갓 쓰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모두 그를 김삿갓(김대립)이라고 부른다.

내가 동쪽으로 여행 갔을때 나도 일찍이 그가 지은 시를 본 적이 있다.

시골 서당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고 그의 시를 마치 고인의 시처럼 외기도 하고 또 그의 시를 베껴 써 놓고 시의 규범으로 삼기도 했다.

금년 봄 울적한 병이 있어 청량사에 수양삼아 갔었는데 거기서 시골서 올라와 있는 낙봉 이상우를 만났다.

그가 '김삿갓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다'고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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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사는 곳은 광주이고 이름은 김란 이라고 합디다."

이때 나는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이 사람이 이명이라고 소리쳤다.

애석하다 그 재주가 놀랄 만 했었다.

우리 형제가 그의 말대로 젊어서 교유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명은 과체시에 힘쓰고 있었는데 범위가 탁 트이고 대담하여 훌륭한 솜씨가 크게 기대되었다.

어찌 과시에서만 그러했겠는가.

문장가로서의 전칙(典則)에 유의하여 매일 글 읽는 소리가 낭낭히 그치지 않고 제자백가의 글을 베끼는 붓을 쉬지 않았었다.

필법이 또한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

- 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