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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09 07:09

청성묘중수비(淸聖廟重修碑)
 글쓴이 : 김철동
조회 : 469  
청성묘(淸聖廟)의 중수(重修)를 기념하기 위한 비(碑)

우리 조선(朝鮮)은 좌해(左海)에 끼여 있으면서 땅이 치우쳐 있고 영토가 작다. 그러므로 보고 들은 것이 강역 안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문헌(文獻)이 천하 사람에게 징험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유연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중국(中國)을 향하여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단군(檀君)은 요(堯)의 왕년과 병립시켰고, 도산(塗山)의 모임에서 부루(扶婁는 옥백(玉帛)을 가지고 우(禹)임금을 조회하였으며 은(殷)의 태사(太師)는 백마(白馬)를 타고 동래(東來)하여 왕검(王儉)의 터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에 인문(人文)은 열렸고 예의(禮義)는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위아래 수천년 동안 도를 배우는 자는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가지고 자임하였고, 다스림을 말하는 자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표준으로 삼았다. 빛나고 빛나는구나.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서야 유감이 거의 없어졌으니 대개 그 예악(禮樂) 제작(制作)의 성대함과 인물(人物) 규모(規模)의 위대함을 가지고 논하자면 감히 중국과 비견할만한 것은 못되지만, 문치(文治)를 지지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며 학교(學校)를 건립하고 사묘(祠廟)를 창립하여 성현(聖賢)을 존숭하고 풍교(風敎)를 부양하는 것은 중국이 아무리 성대하다고 하더라도 혹 우리나라보다 낫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다.
 
대개 오랑캐와 중국의 구별은 인문(人文)이 열렸느냐 그리고 예의가 설립되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나라가 치우쳐 있고 협소하다는 것 때문에 중국의 아름다움으로 스스로를 대접하지 않고 오랑캐의 누추함에 머물러 스스로 편히 여길 수 있겠는가.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땅에 산이 있는데 수양산(首陽山)이라고 한다. 어째서 이 산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산 아래에 동이 있는데 청풍(淸風)이라 하는데 마찬가지로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없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의롭기 때문에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며 채미가(采薇歌)을 짓고 죽었다.”라고 실려 있다.
 
공부자(孔夫子)께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굶어 죽었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일컫는다.”고 말씀하셨다. 오호(嗚呼)라. 두 분의 돌아가신 곳이 참으로 조선의 이 산인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산은 동이의 땅이고 두 분은 중국 사람이니 두 분이 돌라가신 곳이 어째서 이 산에서였겠는가.

천하(天下)의 지명(地名)에는 진실로 유사한 것이 많으니 이 산의 이름이 마침 중국의 산과 유사하므로 두 분의 죽음이 과연 이 동이의 땅에서가 아니었을까. 산은 진실로 그러하다고 하지만 동의 이름 같은 것은 그 뜻을 생각하면 두 분의 실제 행적이 아니라면 그 이름에 부응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산의 이름은 진실로 유사할 수 있다하여도 동의 이름에 그 실적이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이름을 지었겠는가.

맹자(孟子)께서는 “백이(伯夷)는 성인 중에서 깨끗한 분(성지청(聖之淸))이다.”라고 하셨고 또 “백이의 풍성(風聲)을 들은 사람이라면, 완악한 사람이나 나약한 사람 모두 뜻을 세움이 있었다.”라고 말씀 하셨다. 가령 두 분이 여기에서 은거하였다가 돌아가셨다면 이 동에 있는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것을 일컬어 청풍(淸風)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한편 중국의 수양산에도 이른 바 청풍동이라는 마을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원효왕(元孝王) 신사년에 고을의 인사들이 의논하여 이 동에서 두 분을 제사지내자고 하니, 관찰사(觀察使)가 이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그것을 특별히 허락하시고 어서(御書)로 묘액(廟額)을 하사하여 청성(淸聖)이라 하였다. 이는 우리 조에서 처음으로 두 분을 제사지내는 것이었다. 이 동의 이름이 전래된 것은 무려 몇천년이었으니 두 분의 제사가 삼한(三韓), 고구려, 고려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거행될 수 있었으니 어찌 땅의 드러나고 숨는 것과 예가 버려지고 일어나는 것이 절로 그 때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금상(今上) 28년 무자년(순조 28,1828년)에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능악(能岳)이 고을의 인사와 함께 그 묘를 중수(重修)하고 그 글을 조순(祖淳)에게 부탁하였다. 묘가 고쳐진 것은 지금 120여 년 만의 일이고, 중수(重脩)라고 한 것은 또 빈번하므로 이전 사람이 서술한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조순은 일찍이 두 분이 은거하신 산이 우리나라의 수양산인지 중국의 수양산인지 궁금하였다.
 
『사기(史記)』의 주석을 찾아보면 “수양(首陽)은 다섯이 있다.”고 실려 있는데 만일 조선의 산까지를 함께 열거하면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라고 고쳐야 한다. 어째서 같은 이름이 많은 것인가. 은이란 그 곳을 피해 자기의 자취를 없앤다는 말이다. 중국의 다섯 산은 모두 두 분이 숨을 만한 곳이고 조선의 산 하나는 두 분이 숨을 수 없는 곳인가. 이것은 첫 번째 의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모든 다섯 곳은 모두 편안히 거처할 만한 곳이지만 저 두 분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은거하다 죽을 곳은 마땅히 동일한 곳일 뿐이니 다섯 곳이 어찌 모두 거처할 곳이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의문이다.

또 생각해보자. 맹자께서 두 분이 주왕(紂王)을 피해 북해 가의 수양산에 거주하였다고 하셨고 장주(莊周)도 “두 분이 서쪽으로 가서 기산의 남쪽에 이르러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만나서 그를 피해 가다가, 수양산(首陽山)에 이르러 드디어 굶어 죽었다.”고 하였다.
 
맹자(孟子)가 일렀던 조선(朝鮮)의 바다는 또한 북해(北海)이니 대개 중국(中國)의 지세(地勢)는 이른 바 북명(北溟)이나 천지(天池)과 서로 접해 있지 않고 갈발(碣渤)의 바다가 동쪽으로 다하지만 북인가 싶으므로 제나라와 노나라의 동쪽, 유연(幽燕)의 남쪽, 요의 서동쪽, 말갈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북해를 가리킨다. 소무(蘇武)가 소를 친 곳 같은 곳도 조선의 북쪽 경계이니 후한(後漢)의 군치(郡治)로서 제나라 노나라의 동쪽 연안이다.
 
조선(朝鮮)은 연(燕)과 요(遼), 말갈(靺鞨)의 사이에 있으니 이것은 그것이 북해(北海)가 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의문이다.
만일 장주(莊周)가 “두 분이 은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피하여 갔다”고 하였으면, 이치상 마땅히 멀리 도망갔을 것인데 마침내 도리어 풍기(豐岐)와 같은 가까운 곳에서 방황하였다면 필시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이것이 네 번째 의문이다.

옛날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도가 상실되면 성현 중에서 도망가 숨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소사(少師) 양격(陽擊)과 경양(磬襄)이 모두 바다로 들어갔는데 이때 바다란 동해를 말한다. 공부자(孔夫子)께서 구이(九夷)를 그리워하여 뗏목을 타고 가서 살겠다고 하였는데 이 구이(九夷)란 동이(東夷)를 말한다. 성인(聖人)께서는 동장의 풍속이 부드럽고 착하여 군자가 살만 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반드시 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노담(老聃)은 서쪽인 류사(流沙)로 갔으니 그 단이 우리들 유가와 다름을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께서 왕검(王儉)에 거주하신 것은 필시 장소를 가려서 가신 것이니 두 분이 세상을 피하는데 기자의 나라와 이웃하고자 하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는가. 더욱이 해주(海州)의 산은 고사리(薇蕨)가 많으니 기이하다고 여길만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의문이다.

옛날부터 중국(中國)에서 수양을 일컬은 것은 확실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만 진실로 그런 이름이 어떻게 부쳐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옛날부터 중국에서 수양이라고 일컬어진 것은 전하여지는 것에 의문이 있음을 면치 못하니 의심이 어찌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아!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것이 의문이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 분이 직방의 밖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도 그 곳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그 산의 이름이 수양이라는 것만 들었을 뿐이었으며 해외에 수양산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고 중국에 수양산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았을 뿐이므로 끝내 그 땅을 확실히 지적하지 못하고 분분하니 가소롭다 할만 하다.

그러나 옛날부터 조선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하고 문헌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비록 수양산을 지적할 수 있고 그 동에 명명할 수 있었지만, 두 분이 반드시 이곳에 은거하였다는 것을 단정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기에 주석을 단 사람의 자신과 비교해 볼 때 슬픈 일이 아닌가. 조순(祖淳)은 일찍이 이러한 의문을 중국으로 떠나는 공사(貢使)에게 주어 중국의 학사대부(學士大夫)에게 질문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보고 “참으로 시비를 따지기를 잘하는 자로구나.”라고 말할 뿐이었다.

조선이 이미 은사(殷師)를 받들어 왔는데 도리어 다시 두 분 선생을 물리치고자 할 것인가. 끝내 마찬가지로 그 그렇지 않음을 밝힐 수 없었으니 뜻이 이치에 합한다면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뒤에 당나라 이발(李渤)이 말한 것을 보니 수양을 조선으로 정하여 논하였다. 발(渤)은 박식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난 선비이니 그의 말에는 필시 징험하여 근거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내가 어찌 자신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여기어 그 내용을 대략 실은 것은 저 해주의 사람들에게 고하기 위한 때문이다.
 
비록 그러나 두 선생은 만세의 스승이니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으니 옛날의 악은 개의치 않고 인을 구하고 인을 터득하였으니 이 나라의 사람들로 하여금 두 분은 스승으로 삼을 만한 분임을 알고 경모하는 데 게을리 하지 말고 본 받는 데에 그치지 않게 한다면 모두 장차 성인의 무리가 될 것이니 산이 비록 진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분을 제사 드리는 것은 진실로 빛이 있을 것이다. 도리어 사에 거하는 명분과 사를 남긴 실제의 여부가 어찌 윤리를 지지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것에 무슨 상관이겠는가. 산이 비록 진짜라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다시 이것으로 그 분들이 그리워진다.

원임(原任)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규장각검교제학(奎章閣檢校提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안동(安東) 김조순(金祖淳)이 삼가 찬술하였고,

아들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추관사(知經筵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유근(逌根)이 삼가 글씨를 썼다.
무자년(순조 28,1828년) 12월 일
 
 
청성묘란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614&cid=46622&c ategoryId=46622 <scRIPT type=text/javascript> jQuery.noConflict(); </scRIPT> <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s1.daumcdn.net/svc/original/U03/commonjs/uoclike/blog/uoclike.min.js?v=1.1"></scRIPT> <scRIPT type=text/javascript> // jQuery.fn.UOCLike.defaults.host = 'http://like.daum.net' jQuery.fn.UOCLike.defaults.updateServiceCategory=true; jQuery("#blogLikeBtn").UOCLike({ buttonType : 'pc', showLayer : false });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