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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참판 휴암김공 신도비명
(刑曹參判 休庵金公 神道碑銘)

 

이명한 선(李明漢 )
류시영 서(柳時英 書)
남광욱 전(男光煜 篆)
번역 : 국조인물고. 2003.종 14대손 白牙 彰顯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김공(金公) 회이(晦而 : 金光煜의 字)씨가 청음(淸陰) 김상서(金尙書:金尙憲)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그 선부군(先父君)인 참판(參判) 휴암공(休庵公 : 金尙寯의 號)의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두 집이 代대로 형제의 의리가 있으니 君이, 아니면 우리 先人의 묘명(墓銘)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하므로, 나 이명한(李明漢)이 절을 하고 그 행장을 받았는데, 그 행장에 이르기를 ‘안동김씨는 世代가 오래니 신라 말엽에 고창군 성주(古昌郡 城主)로서 고려 태조(高麗 太祖)에 조병(助兵)하여 견훤(甄萱)에게 원수를 갚음으로 태사(太師)에 봉해졌고, 고창군의 태사묘(太師廟)에 모시어 제향(祭享)하는 분이 있으니, 곧 김선평(金宣平)이라, 이 분이 그 시조(始祖 : 鼻祖)가 된다.
 고창은 뒤에 안동(安東)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 자손들이 드디어 안동(安東)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태사의 이후에 사백여 년 동안 자손들이 연이어 계속 경사(慶事)를 물려받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諱) 득우(得雨)라는 분은 중현대부 판전농정(中顯大夫判典農正)을 지냈으며, 삼세(三世)를 지나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휘(諱) 영수(永銖)에 이르렀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고(高祖考)이다.
 장령의 아들이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을 지내고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된 휘(諱) 번이다.
 증이조판서의 아들이 신천군수(信川郡守)를 지내고 증좌찬성(贈左贊成)에 추증된 생해(生海)이다.
 찬성공[김생해]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아들이 군기시정 증이조
 판서(軍器寺正贈吏曹判書) 휘(諱) 원효(元孝)로서, 완산 이씨(完山李氏) 승열(承說)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녀는 공정대왕(恭定大王 : 太宗)의 아들인 근영군(謹寧君)의 후손이다.

 

가정 신유(嘉靖辛酉 1561년 명종 16) 5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諱는 상준(尙寯)이요 字는 여수(汝秀)이니 휴암(休庵)은 그의 號이다.

???????? 어려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서 집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학업을 닦았다.
 

조금 자라서 학궁(學宮)에서 공부하였는데, 시험(試驗)을 보면 번번이 으뜸이 되었으므로, 그 제배들이 감히 경쟁할 생각을 못하였다.
 약관(弱冠)에 초시(初試)를 거처 발해(發解 :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중앙에 보내어 科擧에 應試케 하는 일)에 제 이등(第二等)으로 선발되어 천거(薦擧)되었는데,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문형(文衡)을 맡아서 극구 칭송하였기 때문에 명성(名聲)이 이로부터 더욱 드러났다.

 

임오(壬午 1582년 선조15)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을유(乙酉 1585년 선조18)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선상(善<好>喪 : 喪禮)으로 잘 치렀다고 소문이 났었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더욱 힘써 책을 읽었는데, 아침부터 깊은 밤중[丙夜]에 이르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함께 공부하던 여러 종제(從弟)가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들도 또한 능히 책을 보지 않고서도 글을 외웠다 한다.
 경인(庚寅 1590년 선조 23)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괴원(槐院 : 承文院)에 선임되었다.
 임진(壬辰 1592년 선조25)년에 고상(故相) 심수경(沈守慶)공이 호서지방(湖西地方)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건의토왜(建議討倭 : 倭賊을 討伐)할 때에 공을 벽소하여 종사(從事)하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막료(幕僚)의 군중(軍中) 계획들이 많이 공에게서 나왔으므로 심수경공이 그를 심히 중하게 여겼다.
계사(癸巳 1593년 선조26)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서 승정원 주서(承政院主
書)에 천수(薦搜)되었고, 곧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다가 대교(待敎) 에 승임(陞任)되었다.

 

이때에 왜적들이 해변에 출거(出據)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들이 재제(도적이 다시 침범하는 것)할까봐 우려하여 장차 다시 명병(明兵)을 요청하려고 사신을 선발하였는데, 사기(事機)가 위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신으로 가기를 많이 꺼려하였다.
 상(上 : 임금)께서 제신(諸臣)에게 인문(引問)하시어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렀으나, 좌우에서 응답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상의(上意)가 불쾌 하시고 편치 못하였는데, 공이 바야흐로 사관(史官)으로 붓을 들고 기주(記注)하다가 자진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하개(下价 : 使臣)에 충당해 가기를 자청하니, 上께서 심히 기뻐하여 즉시 이것을 허락 하였지만, 끝내 사관의 자리를 대신 채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지로 가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의 뜻(上意)은 진실로 촉망(囑望)이 크시어 이것을 맡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明年) 봉교(奉敎)에 승임(陞任)되었고,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옮겨졌다가 예조(禮曹)로 옮겼으며, 언제나 전주(銓注)에서 비답(批答)을 내릴 때에 일찍이 공을 빼놓고 다른 사람을 뽑은 적이 없다.
 조정에서 삼로(三路)의 어사(御使)를 설치하여 강직(剛直)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골라서 보낼 때에, 공도 더불어 선임되어 영동(嶺東) 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 범법(犯法)한 관리를 염탐해 조사하였는데, 그 관리가 곧 국사(國事)를 맡은 권력이 있는 대신(大臣)의 사인(私人)이므로 그 대신이 도리어 대간(臺諫)의 신료들을 사주(使嗾)하여 공을 탄핵하니, 임금께서 그 소장(疏狀)을 살펴본 후, 그 진상을 밝히시고 마침내 범법(犯法)한 관리를 죄주어 공을 바르다고 하였다.
 얼마 뒤에 영광군수(靈光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이 영광군은 본래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또 왜적(倭賊)과 가까운 땅이므로 ‘군무(軍務)가 많고, 쓸 만한 인재(人材)를 골라 자격(資格)에 관계없이 사람을 수용(需用)하여 임명해야한다’고 빙자(憑藉)하여 월격(越格)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실지로는 권력 있는 대신이 배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불편한 눈치를 뵈지 않고 성심을 다하여 봉직(奉職)하
니, 삼년(三年) 만에 행정(行政)이 잘되어 강포한자를 억누르고 간사(奸詐)한
자를 꺾으며 미염(米鹽 : 쌀과 소금)이 충실하게 쌓여 교일(交溢)하니, 정적(政績 : 考課)이 일도(一道)에서 으뜸이 되었다.

 

정유(丁酉 1597년 선조30)에 왜적(倭賊)이 호남 지방에 핍박(逼迫)하니 해변 가에 있는 주(州) , 군(郡)의 수령관(首領官 : 원님. 지방행정 책임자)을 모두 무신(武臣 : 武官)으로 바꾸게 되어 공을 방백(方伯)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으며, 명나라 마 제독빈사(麻提督 : 麻貴. 檳使)를 접대하는 사신에 벽소당하여 그를 따라 영남(嶺南)지방으로 수행하니, 도산(島山)의 전역(戰役 : 兵役)에 항상 군중(軍中)에 있었다.

????????? 다음해에 군자감 정(君子監正)으로 승임(陞任)되고, 사예(司藝)에 옮겼다가 또 내섬시 정(內贍寺正)에 개차되었고, 호남 지방의 조발사(調發使)에 충원되어, 명나라(明朝)의 수병(水兵)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기해년(己亥 1599년 선조32)에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변방으로 나가서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어 이어서 이 고을 산성(山城)을 수축하였는데, 방백(方伯)이 군영문(軍營門)을 개설하여 조세를 받아서 수송(輸送)하면서 그 보장을 좌우의 고  을에 교대로 책무를 지웠기 때문에, 전임자(前任者)들이 모두 유능하다고 선발되어 이곳 임지에 도착하였다가는 번번이 낭패하여 퇴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이 부임하여 일이 순조롭고 백성을 잘 무마(撫摩)하고 혜애(惠愛)가 흡족(洽足)하여 수년이 채 되지 않아 떠돌라 다니던 백성들이 다 돌아갔고 온갖 폐단도 잘 다스려졌으므로, 체신(體臣)과 도신(道臣)들인 체찰사(體察使) , 관찰사(觀察使) 및 대각(臺閣)의 사자(使者)인 대사자(臺使者)가 서로 잇따라 그 치적을 상등으로 메겨 보고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직질(職秩)을 특명으로 올려주고 교서를 하사하여 포미(褒美)하였다.

 

임인년(壬寅 1602년 선조35)에 병으로 사임하고 해귀하였는데, 대신(大臣)이 또 공을 천거하여 사도 조도사(四道調度使)로 천임(遷任 : 천거하여 임명)하니 관동(關東)과 영남(嶺南) 및 호남(湖南) 호서(湖西) 지방에 출입하면서 험조(險阻)한 수 천리의 험로(險路)를 거쳐 속량(粟糧)을 수만 석이나 얻었으므로, 군량이 충족하여 백성이 고생되지 않았다.
 3년 만에 돌아왔으나 곧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부임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것은 선조가 일찍이 왜란(倭亂)때에 주필하시던 땅이라고 생각하여 이곳 해주에는 반드시 현후(賢候)를 보내어 주민(州民)을 위무(慰撫)하려 하실 때 전주(銓注)에서 선임한 자들이 모두 상의(上意)에 맞지 않아 세차레나 개의(改擬)하여 의망(擬望)을 바꾸어서 마침내 공을 임명하였는데, 친구들은 공이 오래도록 외지에서 노고(勞苦)함을 민망히 생각하여 병사(病辭)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공이 위연(威然)히 말하기를 ‘출신사군(出身事君) 하는데 평탄(平坦)하고 험난(險難)한 것이 모두 다 내 직분(職分)이다’라 하고 힘써 해주 고을에 부임하였다.
 해주(海州)의 전정(田政)이 오래도록 기강(紀綱)을 세우지 못하여 관리들이 상하에 부정(不淨)한 손을 써서 이리저리하니 호우(豪右)들이 교묘히 세금을 면(免)하지만 단약(單弱)한 백성들은 지나치게 괴로움을 받았는데, 공이 문권(文券)을 만들어 이것을 정리하니 요부가 비로소 규법(規法)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 오랜만에 편리하게 되니 서로들 말하기를 ‘김후(金候)의 은혜는 대대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듬해 관직을 사임하고 해귀하여 돌아왔으나 가을철에 죽주목사(竹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죽주(竹州)도 산성(山城)이 있어서 호령대도(湖嶺大道 :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의 큰길에 해당)에 처한 지방이므로 문무(文武)를 겸한 재능을 갖추지 아니하면 고을을 맡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신년(戊申 1608년 선조41)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陞進)하였다.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 북경[京師]에 입조(入朝)하였으며 돌아와서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가 곧 바꾸어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가 태감(太監) 염등을 보내어 책봉(冊封)하는 글을 내릴 때에 공이 예방(禮房)의 승지를 맡아서 정례(典禮)를 주선하는데 궐전(闕典)이 없었으므로,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진계(進階)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승탁(昇擢)되었다가 교체되어 도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부총관(副總管을 겸하였으며 그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형조참판(刑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同知春秋館事義禁府事)를 겸하였다.

???????? 그때에 관부(官府)의 우두머리가 외방(外邦)에 있었기 때문에 형조(刑曹)의 사무를 대리하여 옥사(獄事) 맡아서 판결(判決)한 것이 년정(年正 : 公平)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을 칭송하였다.
 

임자년(壬子 1612년 광해4)에 판서공(判書公 : 아버지 金元孝)이 서세하니 너무 애훼(哀毁)하여 자주 병이 나고,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가 이러나자 정협(鄭浹)이 공의 부자(父子)를 무고(誣告)하여 공이 바야흐로 곤독해 하며 왜 무고를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갑자기 피체(被逮)되었다.
 광해군이 친히 엄한 국문(鞠問)을 더하자, 공이 문부와 대조하여 차서(次序)을 말하는데 약간의 실수가 없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공의 일을 보는 이들은 모두 그 질병이 정산을 혼란하게 한 줄을 알았으나 이것을 오문(誤聞)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공을 비정(非情)하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공이 석방되자 병이 더욱 심해져서 이러나지 못할 번 하였다.
 상복(喪服)을 벗자 문을 닫고 외사(外事)에 간섭하지 않으며 외인(外人)과 왕래하지 않았으며, 혹 묻는 이가 있어도 스스로 변백(辨白)하지 않고 묵묵히 침묵하면서 오직 시(詩)를 지어 자기의 뜻을 나타냈을 뿐 이었다.

 

무신년(戊申 1608년 광해즉위)에 간신(奸臣)들이 폐모(廢母 : 仁穆大妃를 廢位하고 永昌大君을 귀양 賜死)할 것을 청하였을 때에, 백료(百僚)들이 공구(恐懼)히 지내고 있으나 공은 이에 예열(詣列 : 班列에 나아감)하지 아니하였는데, 광해군(光海君)이 묻기를, ‘金某가 어찌하여 참열하지 않았는가?’하였고, 간당(奸黨) 중에 동리(同里 : 같은 마을)하여 사는 자가 또 조정에서 정의(庭儀)로 모후(仁穆大妃)를 폐위 시킬 것인가, 폐위시키지 아니할 것인가를 의논할 때에 병자(病者)들도 집에 있으면서 의논하게 하였으나 공은 끝끝내 헌의(獻議)하지 않았다.
 뒤에 명나라 조사(詔使)가 이르자, 전조(銓曹)에서 공을 영위사(迎慰使)에 충임(充任)하였는데, 광해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정청(庭廳)에 참여치 않는
자를 어찌 빈사(賓使)에 임명 하겠는가?’하여 공을 폐기(廢棄)하고 녹용(錄用)하지 아니한 지가  11년이 되었다.

 

계해년(癸亥 1623 仁祖元年)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언관(言官)들이 뒤따라 지
난 일을 허물하여 공을 추구(追咎)하여 연좌시켜서 함경도 길주(吉州)에 유배시켰다가 정묘(丁卯 1627년)에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량이(量移:罪를 참작하여 流配地를 옮기는 것)하였는데, 계유년(癸酉 1633년 仁祖11)에 대사면(大赦免)을 내리어 스스로 종편(從便)하도록 허락 하였고, 을해년(乙亥 1635년 인조5)에 죄를 용서하는 은전(恩典)을 받아서 몽은입도(蒙恩入都)하였다.
 그해 8월 29일 집에서 서세(逝世)하였는데, 춘추가 75세였다.

 

부인(夫人) 李氏는 현령(縣令) 이천우(李天祐)의 따님으로, 부모에게 효도(孝道)와 순종(順從)을 독실히 하고  종족(宗族)에게 인자(仁慈)하며, 녀공(女工 : 여자의 길삼)과 부녀자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민첩하였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도 스스로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여 드디어 그 학업(學業)을 이루게 한 것은  모두 부인의 내조(內助) 덕분이었다.
 부인은 공보다 23년을 먼저 앞서 계축(癸丑 1613년 광해5)에 졸(卒)하였는데, 그 묘소는 판서공의 조(兆 : 무덤 墓)뒤에 유방(酉方)을 향한 자리에 있었으나, 이때에 공과 더불어 합장(合葬)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욱(光煜)은 곧 관찰공(觀察公)이고, 차남은 광위(光?)이니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냈으며, 女는 참판 윤이지(尹履之)에게 출가(出嫁 : 適, 혼인)하였다.
 관찰공의 一女는 이적(李木翟)에게 시집갔다.
 현령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수익(壽翼)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이고, 다음은 수기(壽箕)이며, 다음은 수일(壽一)인데 관찰공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딸은 풍래군 이번(豊萊君 李?)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나이가 어리다.
 사위 참판공(參判公 : 尹履之)은 8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長男) 윤탄(尹坦)은 군수(郡守)이고, 차남(次男) 윤강(尹堈)은 현감(縣監)이고, 3남 윤식(尹埴)은 요절(夭折)하고, 4남 윤우(尹?)는 현감이고, 5남 윤점(尹?)은 감찰이고, 6남 윤개(尹塏)는 판관이고, 7남 윤성(尹城)은 진사(進士)이고, 나머지는 나이가 어리며, 그 딸은 승지(承旨) 송시길(宋時吉)에게 시집갔으니 내외 증 현손(曾 玄孫)이 72인이다.
 후배(后配) 김해김씨(金海金氏)에게서 3子를 두었는데 , 광혼(),광련(光煉),광희(光熺)이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의 행동을 잘 수칙(修飭)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뜻을 어기지 아니 하였다.
 서모(庶母)의 천성(天性)이 섬기기가 어려웠으나 공은 간곡(懇曲)하게 받들어서 마침내 그 환심을 얻었던 것이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명확하게 살폈기 때문에 항상 명예(名譽)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이해(利害)관계에 이르러서도 분연히 스스로 초탈하여 비록 엄한 상관(上官)이라도 굽히지를 아니하고 하리(下吏)를 단속하는데도 엄격한 훈령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총명(聰明)하고 강단(剛斷)하였기 때문에 서리(胥吏)들이 외탄(畏憚 : 두려워하고 꺼리는 것)하는 바가 되었다.
 공이 장차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부임하려고 할 때에, 고을의 후리(候吏 : 斥候노릇을 하는 官員)가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일찍이 엄격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태세왕(太歲王)’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먼저 이를 알리자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는데, 지금까지 그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검약(儉約)하였는데, 관위(官位)가 높아도 변함이 없고 음식을 맛있는 것을 취하지 않으며 의복과 거마(車馬)도 겨우 검소하게 갖추었을 정도뿐이었다.
 천성이 글을 즐겨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만년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여 손수 그 내용을 20권으로 초록(抄錄)해 놓고 제목(題目)을 ‘강감요약(綱鑑要略)’이라 이름 하였는데, 보는 이가 그 정요(精要 : 정밀하게 요약한 것)함을 탄복하였다.
 공이 길주(吉州)에 귀양 가 있을 때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러 선유(善誘)하였기 때문에 신발이 항상 첨들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뒤에 공의 부음을 듣고 모두 다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
슬프다!
 공이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출시(出身)하여 명성(명성)이 높았고 내외직(內外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여 가는 곳마다 훌륭한 명성(名聲)이 있었다.
 이미 세상에 쓰일 재능을 가져서 장점을 스스로 나타냈던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세상에서도 그 재능과 일을 알아주었고, 또 일에 능숙하여 중임(重任)을 맡았었다.

 

그러나 죄에 연좌(連坐)되었을 적에 형세에 따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몸과 명성이 벼슬길에 허통(許通)하는가 막히는가의 기로(岐路)에 있다가 불행하게도 재액(災厄)을 만나서 사고로 떨치지 못하였고, 마침내 증어로 어려움을 겪다가 불우(不遇)하게 세상을 마치니, 사람들은 진실로 그 끝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지만, 그 남은 복록(福祿)을 누려서 바야흐로 벼슬길에 진출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이것이 이른바 ‘복록이 당사자에게 있지 아니하면 그 후손(後孫)에게 있다’는 것이다.  공이 무었을 한(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