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문턱까지 오면서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머리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자들을 보았고, 밀리는 괴력에 발을 옮기는 순간 발밑에 쓰러진 사람이 밟히는 것을 느끼며 겨우 과거장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 서는데 어떤 사람은 문설주에 끼인 채 밀리는 힘에 반 바퀴 뒤틀려 문안으로 들어갔고, 병연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등 뒤에서 휘두르는 몽둥이에 등짝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쓰러지면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앞서가는 패거리들을 따라 뛰었다.

터진 봇물에 밀리듯 쏜살같이 달려 영화당(暎花堂) 앞마당의 춘당대(春塘臺)까지 죽기 살기로 뛰어야 했다.

이 엄숙하고 신성해야할 과거장에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미친 듯 뛰어야 하는가.

이는 좋은 앞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좋은 자리란 과제(科題)가 잘 보이는 앞쪽으로 한발이라도 더 가까이 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시험지에 다 쓴 답안지를 남보다 더 빨리 제출하기 위해서도 앞쪽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구에서 들려오는 아우성과 비명소리를 뒤로 들으며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서 선접꾼의 부축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둔탁하게 뛰는 참판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갓 테두리는 다른 패거리의 선접꾼이 휘두르는 몽둥이가 스쳤는지 찢기었고, 입고 있는 도포는 어깨에서 팔로 이은 이음새가 절반은 타져서 너덜거리는가하면, 도포 허리에 멘 세조대(細條帶)가 풀려 술이 땅에 질질 끌리는 모양새가 처절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했다.

병연은 그들 뒤를 따르다가 그들이 자리를 잡은 뒤쪽으로 여유 있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같이 온 무리들은 두세 사람 앞쪽에서 자리를 잡았다.

먼저 도착한 선접꾼이 들고 온 막대기를 땅에 박고 큼직한 종이 양산을 펴서 막대기에 묶어놓고 돗자리를 펴는데 옆 사람에 걸리어 펴지지 않으니까 그는 덜 풀린 돗자리를 발로 툭툭 찬다.

실은 돗자리를 차는게 아니라 거치적거리는 옆 사람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도망치듯 뒤쪽으로 물러나 병연의 옆에 와서 앉는다.

병연은 고개를 돌려 자리다툼에서 밀려난 그를 바라보았다.

병연이보다 두세 살 더 먹어 보이는데, 시골서 온 선비인 것 같았다.

그도 저승문턱을 통과하느라 머리에 쓴 갓도 온전치 않았고 무척 수척해보였다.

실학자 박지원이 말한 '열에 아홉'이란 의미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과거장 밖에서 구사일생으로 출입문을 통과하여 이곳까지 오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저승문턱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일 테고, '만에 하나'는 만 명 중 한사람이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이다.

1년에 몇 번씩 치루는 부정기시에도 10만여 명이 몰리는데, 정기시인 식년시로 3년마다 열리는 대과에는 날이 갈수록 응시자가 늘어 10만~1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당시 서울의 인구가 15만~20만 명이니 서울 인구에 육박하는 수험생이 전국에서 몰렸으니 과거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식년시도 3년 만에 33인을 뽑는데, 1년에 11명꼴로 응시자를 감안하면 '만에 하나'가 되는 셈이다.

병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어 거리가 있었으나 과제를 걸어놓으면 보일만한 곳에 위치한 자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공지를 지나 수목이 서있는 숲속으로 수험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자리다툼이 이어지며 시끌벅쩍 했다.

여기에 과거시험장 통제를 맡은 관노(官奴)들의 위세가 더 가증스러웠다.

시험 감독관인 경시관(京試官)으로 파견했던 곡운(谷耘) 권복(權馥.1769~?)은 과거장에서 겪은 일들을 비중 있게 다룬 '곡운공기행록(谷耘公紀行錄)'에 이런 글도 기록했다.

"관노들이 선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매우 공손하지 못하고 말끝마다 '너, 너" 하며 깔보면서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 마치 소송하는 사람을 대함과 같다."라고 썼다.

관노라 하면 관가에서 부리던 노비가 아닌가.

아침 해가 담장 위로 솟아올랐다.

곧이어 시험 감독관들이 나오고, 웅성거리던 과거장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상시관(上試官)이 나오자 큰북이 울리며, 커다랗게 쓴 과제를 기둥에 걸었다.

응시생들은 서둘러 과제를 적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서두름은 남보다 먼저 쓰고, 남보다 먼저 답안지를 제출해야 한다는 과거의 속성이 그들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