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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1-07 06:58

권력에 맞선 서리(胥吏)들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738  
 

권력에 맞선 서리(胥吏)들          이덕일 역사평론가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계단이었던 조선의 관직은 크게 두 개의 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종6품 이상 참상관(參上官)과 정3품 이상 중 당상관(堂上官)이 그것인데, 참상관이 되어야 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당상관이 되면 주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종9품에도 속하지 못하는 하급 서리(胥吏)가 있어서 중인들이 맡았다. 규장각 서리 유광진(劉匡鎭)의 묘지명은 정조 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가 써서 그의 '극원유고'에 실려 있다.

일개 서리의 묘지명을 왜 규장각 각신이 썼을까? '정조 즉위 초 권흉(權凶)의 횡포가 심해 어느 누구도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나 유광진만은 이치로써 따져 그 기세를 꺾는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라는 묘지명 내용이 말해 준다.

정조 초의 권신 홍국영(洪國榮)에게 맞섰던 서리이기 때문에 이만수가 존경의 마음으로 묘지명을 쓴 것이다.


영조 때 호조의 서리 김수팽(金壽彭)은 야간 숙직 중 내시가 와서 10만금을 가져오라는 임금의 명을 전했다.

대궐문이 닫히면 금전을 출납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고 거부하자 내시는 일개 서리가 왕명을 거역한다며 노발대발했다.

김수팽은 황소걸음으로 호조판서의 집에 가서 결재를 받은 뒤에야 돈을 내주니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조선 후기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나오는 일화이다.

김수팽이 공문서를 가지고 호조판서의 집에 가서 결재를 청했을 때 판서가 손님과 바둑을 두느라 결재가 늦어지자 김수팽은 섬돌 뒤에 올라가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결재를 받아낸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판서가 사과하며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품계도 없는 서리들이 고관은 물론 잘못된 왕명에도 맞섰던 이 일화는 지금 인구에 회자되는 국정홍보처 고위직의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과 대비된다.

중앙부처 실국장이면 조선의 당상관이다. 차라리 '영혼을 팔아야만 자리를 보존할 수 있던 상황임을 알지 않는가'라고 말했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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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의 08-01-07 14:29
답변  
김수팽 [선조님]의 의리의 행위야 말로 요즘 고위직에 있는 공직자들도  좀 참고로 하고

본 받아야 하지 않을 런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충  의[한]--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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