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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5-26 10:33

[46편]한식경도 못되어 글을 다 쓴 병연은 답안지에 쓸 사조단자를 남겨두고 생각에 잠겼다.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990  

병연은 준비해 온 지필묵을 가지런히 놓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시상을 구상했다.

좀 전에 출입문에 들어올 때 뒤쪽에서 휘두른 막대기에 얻어맞은 등짝이 얼얼해 왔다.

다행이 짊어진 필낭 때문에 큰 화를 면한 셈이다.

만일 필낭을 걸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뭇사람에게 짓밟혀 압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무서운 사선을 넘느라 밀고 밀리는 북새통에 사력을 다해 출입문을 통과해서인지 팔다리에도 통증이 느껴왔다.

병연의 붓은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평소에 웅얼거리던 노래가사를 베끼듯 막힘이 없었다.

앞자리에서 쫒기 듯 뒤로 밀려나 병연의 옆에 앉은 자도 심중히 생각하며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사천리로 써내려가는 병연의 필치에 놀라 숫제 붓을 멈추고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자신의 글쓰기를 잊고 있었다.

병연은 주위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구상되는 글을 답안지에 거침없이 써내려갔고, 글을 쓰기 시작한지 한식경도 못되어 그 많은 글을 다 써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와서 앞줄에 앉은 무리들은 서로가 맞추느라 촌음을 다툰다.

거벽은 글을 짜내어 쓰느라 분주했고, 옆에 앉은 사수는 그의 글을 옮겨 쓰느라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두 선접꾼은 글쟁이들의 좌우에 앉아 시험 감독관들의 행동을 응시하다가 시관의 시선이 그들에게 지나치면 재빨리 사수에게 신호를 보내고 사수는 거벽의 붓끝에서 시선을 떼고 자세를 바로 한다.

그러나 시관들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이 통례였다.

만일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후사가 두려워서였다.

시험지에 글을 다 쓴 병연은 붓을 멈추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는 답안지에 꼭 써야하는 사조단자(四祖單子)였다.

사조단자란 아버지, 조부, 증조부, 그리고 외조부의 생년월일과 관직을 말한다.

만일 답안지에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김익순, 관직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 외조부의 명함은 이유수, 관직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그리고 자신의 본관은 안동(장동) 김 씨라 기입하면 이것만 읽어도 과거급제는 따 놓은게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사실대로 조상의 명함과 관직을 기입한다면 입격에서 제외될 것은 뻔한 이치이고, 폐족의 신분으로 과거에 응시한 죄과가 따를 것이다.

그렇다고 변성명으로 있는 그는 조상의 명함을 생각나는 대로 생소한 변성명으로 기록해 놓으면 채점관의 시야에서 멀어질 것이고, 급제를 하더라도 뒷조사에 들통이 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제기랄!"

병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뭘 보고 있는거야!"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시험 감독관이었다.

그는 병연의 옆에 앉아있는 선비에게 다가가 시험지를 낚아채고는 손에 들고 다니던 도장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이더니 도장 하나를 꺼내어 그의 시험지에 꾹 눌러 찍는다.

절반이 넘게 쓴 시험지 상단에 고반(顧盼)이라 쓴 붉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고반'이란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자를 시험 감독관이 적발하여 찍는 도장이었다.

인재등용문인 과거시험에 부정과 비리행위가 많아, 순조18년(1818)에 성균관 사성 이영하가 과거시험 부정 형태를 몇 가지 지적하여 상소한 기록을 보면,
 차술차작(借述借作 : 남의 글을 몰래 베끼는 행위),
 입문유린(入門蹂藺 : 수험생이 아닌 자가 시험장에 들어가는 행위),
 수종협책(隨從挾冊 : 수험장에 책을 들고 들어가는 행위),
 정권분답(呈券分遝 : 미리 쓴 답안지로 바꿔치기 하는 행위),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장 밖에서 다른 사람이 써주는 행위),
 혁제공행(赫蹄公行 : 시험 주제를 미리 유출하는 행위),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지정된 감독관을 바꾸어 들어가는 행위),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시험지에 낙서를 하거나 농간을 하는 행위)
 등 이밖에도 수많은 상소가 올랐으나 김병연 시대에는 과거시험의 부정행위가 더욱 기승을 부려 통제가 불가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