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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2-10 16:51

노론 학맥과 청음가문
 글쓴이 : 김우현
조회 : 2,338  
 

노론학맥과 청음가문


                                                                       김 우 현




김상헌 가문, 節義와 好學의 精神


----3수(壽) 6창(昌)------


[1] 청음 김상헌과 ‘3수(三壽)’,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살고 있는 (신)안동김씨는 총21,554명이다.


 안동김씨는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구)안동김씨,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신)안동김씨로 구분한다.

 신안동김씨 중에도 청음 김상헌의 증조 김번이 안동에서 올라와 서울 지금의 자하동 인근(효자동 부근 )에 터를 잡고 김상헌 김상용 형제가 대를 이어 이곳에서 살았으며 김상헌 7대손 김조순(순조의 장인)도 자하동에 살다가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김조순의 아들 유근과 좌근, 조순의 양손 병기는 교동에 그대로 살았고 철종의 장인 김문근과 그의 생가 조카 김병학과 병국이 전동에 각각 옮겨 살기도 했다.

 김상헌의 증조부부터 그 후손들이 자하동을 중심으로 세거했기 때문에 이 안동김씨 가문을 특히 ‘장동김씨’라 부르고 있다. 줄여서 ‘장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동김씨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은 조선후기 3-400년 동안 15명의 상신과 6명의 대제학, 2명의 호당, 1명의 청백리, 9명의 장신(將臣), 그리고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김상헌의 자(字)는 숙도(叔度). 호(號)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김상헌은 도정 극효의 아들로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김극효는 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사위이다.

 정유길은 영의정 정광필의 손자이며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이 좌의정이고 정창연의 손자 태화가 영의정, 치화가 좌의정이다.

 좌의정 정유길은 김상헌의 외조부이고 좌의정 정창연은 김상헌의 외삼촌이다.    정유길은 사위가 둘이다. 하나는 김극효이고 또하나는 유자신이다. 유자신의 딸이 광해군의 비(妃)가 되었다. 김상헌은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와 이종 사촌간이 된다.


 청음은 윤근수, 성혼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와 이조의 좌랑,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차 안무어사로 파견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과 이황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23년(광해군 5) 칠서지옥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죽음을 당할 때 김상헌의 며느리(광찬의 배위)가 김제남의 손녀인 관계로 파직되자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조참의에 발탁되고, 공신세력의 보합위주 정치에 반대, 시비를 엄격히 가리고 권선징악을 주장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 대사헌을 다섯 차례 역임하면서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최명길이 나라의 장래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항복문을 작성했다. 이를 본 김상헌이 그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리며 통곡했다.

 최명길도 찢어진 항복문을 주우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울부짖었다.


 김상헌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그 때 읊은 시는 너무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이후 6년여 동안을 청에 억류되어 있었다. 김상헌은 나중에 잡혀온 최명길과 옥살이를 같이 하는 동안 서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명길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김상헌의 의연함에 탄복했고, 김상헌도 최명길의 주화(主和)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김상헌은 "두 세대의 좋은 우정을 찾고, 백년 묵은 의심이 풀리도다."라고 시를 읊었고, 최명길도 "그대 마음 돌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道)는 고리 같아 때에 따라 돌고 도는구나."라며 김상헌의 절의를 칭송했다.

 그 후로 김상헌은 자손들에게 최명길 집안과 대대로 세의(世誼)를 도모하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1645년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경제(京第)를 떠나 양주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증조부 김번 대에 마련한 위토가 석실에 있었으며 조부 김생해가 지은 병사(丙舍)가 있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대로(大老)로 존경을 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효종에게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면서 김집 등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김상헌은 월정 윤근수와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이정구, 김유 , 신익성, 이경여, 이경석, 김집 등과 가까이 지냈다. 김상헌은 청서파의 영수로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谷雲集>


 글씨에도 조예가 있어 동기창제(童其昌體)를 잘 썼다. 또 시문에도 능하여 청음전집 40권을 남겼다. 묘소는 남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에 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김상헌의 청렴함을 칭송하는 글이 실려 있다. “김상헌이 관리로 청렴결백했다.

 어느 벼슬아치는 자기 마누라가 뇌물을 받아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했다. 이에 김상헌은 ‘부인의 청(請)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벼슬아치가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늘 김상헌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자기만 청백(淸白)하면 족(足)하지 어찌 남을 본받게 하여 나까지 이렇게 고생시키는가?”라고 했다.

 어느 왕족이 정자를 짓는데 국법으로 금한 원주(圓柱)를 세웠다. 김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즉시 그 둥근 기둥을 모나게 깎아 다시 세웠다고 한다.


 김광찬은 상헌의 양자(養子)이다. 김광찬의 자(字)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이다. 김광찬은 김상관의 아들이다.

 김상관은 상용의 동생이며 상헌의 형이다. 작은 아버지인 김상헌(尙憲)이 무후하여 상관의 아들 광찬으로 입양계대하였다.

 김광찬은 162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세마(洗馬)를 거쳐 통진과 교하의 현감 등을 지냈다.

 1661년(현종 2) 공조참의가 제수되었으며 청풍군수와 파주목사를 거쳐 중추부 동지사에 이르렀다. 부친을 닮아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김광찬의 아들 삼형제, 즉 김수증, 김수흥(김상관의 양손으로 출계), 김수항이 안동김씨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 가문의 중흥을 이룩했다. 김수증이 공조참판, 김수흥이 영의정, 김수항이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냈다.


 김수증은 김상헌의 장손이며 광찬의 맏아들이다. 김수증의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김수증의 배위는 문충공 회곡 예조참판 조한영의 딸 창녕조씨이다.

 조한영은 공조참판 조문수의 아들로 양대(兩代)가 문장이 뛰어났다.

 김수증은1650년(효종 1) 생원이 되고, 1652년 익위사세마를 거쳐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벼슬살이보다 자연의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서울에 암자를 짓고 그 옥호(屋號)를 부지암(不知菴) 또는 무명암(無名菴)이라 했다.


 처사적인 선비의 삶을 동경하여 늘 외직을 원한 끝에 회양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단양의 풍경을 특히 사랑하여 단양 8경의 제2경을 중선암이라 명명(命名)했다.

 층층으로 쌓인 백색의 바위를 감싸며 맑은 물이 흐르는 중선암에서 쌍용이 승천하였다하여 그 곳을 ‘쌍룡폭’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곡운은 김시습과 송시열의 조상(彫像)을 만들어 서울에 사는 집 근처에 유지암(有知菴)이란 당을 지어 모셔 놓고 숭배했다.

 곡운은 늘 유가의 길을 실현할 이상향으로서 매월당 김시습의 유적지인 강원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 일대를 마음에 두었다.

 곡운은 온 식구를 이끌고 1670년(현종 11) 그 곳에 들어와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동생 김수항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곡운은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이름을 따다가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하였다.    곡운구곡을 경영하면서 화가 조세걸(曺世傑)에게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1699년 여름까지 약 10년에 걸쳐 지어진 강원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화음동정사는 그의 생애 말년을 보낸 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송풍정, 삼일정, 부지암, 유지당 등 몇 채의 건물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흩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삼일정, 월굴암, 천근석이라 새긴 조경용 바위만 남아있다.

 30여 년간 곡운의 보금자리 곡운구곡은 훗날 정약용, 유인석, 최익현 등 명사들의 순례지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경기 지역 선비문화의 요람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1곡 방화계에서 9곡 첩석대 까지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김수증은 갑술옥사 뒤에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좌윤,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김수증의 셋째 딸은 평산 신씨 예조판서 신정의 며느리가 되었다. 신정은 영의정 상촌 신흠의 손자이다.


 김수흥은 김상헌의 손자요 김광찬의 둘째 아들로 김광혁의 후(後)로 입양계대하였다.

 김수흥은 김상관의 양손(養孫)이다. 김수흥의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동곽산인(東郭散人)이다.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김수흥은 송시열을 마음에 스승으로 여겨 송자대전을 탐독했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5년(효종 6)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부교리와 도승지 등을 거쳐 1666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수항이 우의정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그 자리에 나갔다.


 1674년 영의정으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의 기년설에 대해 대공설을 주장했다.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양주에 가 살았으며 1688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89년 다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 이듬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김수항은 김상헌의 셋째 손자이다. 김수항의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김수항의 배위는 참의 나만갑의 손녀 안정 나씨이다. 김수항은 1646년(인조 24) 사마시를 거쳐 1651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1656년(효종 7)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정언, 교리, 이조정랑 등 청환직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1659년 승지, 1661년 이조참판, 이듬해 대제학에 특진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김수흥과 함께 대공설을 주장했다.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1675년(숙종 1)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윤휴, 허적, 허목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에 부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다가 다시 영암에 부처되었다. 1680년 영의정이 되고, 1681년 현종실록 편찬 총재관을 지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진도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전서를 잘 썼으며,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가학을 계승했으며 절의(節義)가 있었다.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 사림의 종주요, 노론의 영수로 중망이 있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변려문을 잘 써서 당대 제1인자의 칭을 들었다.


 김상헌의 맏손녀는 용인이씨 목사 이정악의 부인이 되었다. 이정악의 조카가 좌의정 이세백이다.

 둘째 손녀는 풍산홍씨 문경공 관찰사 홍이상의 손부가 되었다.

 넷째 손녀는 은진송씨 판서 송규렴의 아내가 되었다.


 김창국은 김상헌의 증손이요 김수증의 맏아들이다. 김창국은 성천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전주이씨 판서 이경직의 손녀이다.

 김창국의 셋째 아들 김익겸은 별제를 지냈다. 아내 창원 황씨가 죽고 좌의정 이관명의 딸 전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김창국의 맏딸은 연안이씨 문간공 이조참판 이희조의 아내가 되었다. 이희조는 부제학 이단상의 아들이다.

 이단상은 우의정 이정구의 손자이며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이고 대제학 이일상의 동생이다. 김창국의 둘째 딸은 숙종 후궁 영빈이다. 영빈 김씨는 문정공 김상헌의 현손녀로 1669년(현종10)에 태어나 15세에 숙종의 후궁이 되어 귀인의 첩지까지 받았으나, 장희빈의 모략으로 본가로 돌아왔다.

 장희빈이 죽자, 그 다음해인 1702년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았다. 그 뒤로 외롭게 30여년을 더 살다가 1735년에 후사(後嗣) 없이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은 김상헌의 증손이며 김창국의 동생으로 대제학 택당 이식의 손녀 덕수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2] ‘6창(六昌)’과 제제다사(濟濟多士)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 여섯이 인물이 뛰어나 그들을 세상 사람들이 ‘6창(六’昌)’이라 했다. 6창은 김창집(昌集),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昌緝; 緝자는 ‘집’으로도 발음된다.), 김창립이다.

 이 ‘6창’은 도학(道學), 문장(文章), 청절(淸節)로 조야(朝野)에 중망을 받았다.    김창집은 노론4대신의 일인이다.

 농암 김창협은 대제학, 예조판서 등의 벼슬이 내려도 불취하고 문학과 유학의 대가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농암과 함께 삼연 김창흡은 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김창업도 형들 못지않게 도학 문장이 울연했다. 이들이 안동김씨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 가문의 재중흥(再中興)을 이룩하였다. 6창의 아들 손자들의 도학, 문장도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김창집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다. 영의정 수항(壽恒)의 맏아들이다. 1672년(현종 13) 진사가 되고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부친이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자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아버지 수항 형제의 관직이 복구되고 병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듭 사양하였다. 뒤에 철원부사로 치적을 올리고 강화부유수, 예조참판, 개성부유수와 호조, 이조, 형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 뒤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 말년에 왕이 병석에 눕자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경종은 몸이 병약하고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왕세제(王世弟: 英祖)의 책봉을 상소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으나 소론파의 조태억, 이광좌 등에 의하여 대리청정이 취소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신임사화가 일어나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사사(賜死)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관직이 복구되고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제겸은 김상헌의 현손이며 김창집의 맏아들이다. 김제겸은 자가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이다. 1705년 진사가 되고, 1710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이어 고양군수를 지냈다.


 1719년 문과에 급제, 우부승지가 되었다. 신임사화 때 아버지가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賜死)되자, 울산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령에 옮겨져 사사되었다.

 신임사화 때 함께 죽은 조성복, 김민택, 김제겸을 신임사화의 삼학사(三學士)라 칭한다. 김제겸에게 부조의 은전이 내렸다. 시호는 충민공이다. 배위는 은진 송씨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녀이다.


 김창집의 맏딸은 여흥민씨 우의정 민진장의 며느리가 되었다. 민진장은 좌의정 민정중의 아들이다.

 김창집의 둘째 딸은 여흥민씨 좌의정 민진원의 며느리가 되었다. 민진원은 숙종 국구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아들이다. 민정중과 민유중은 형제간이다.

 김창집의 맏딸은 민정중의 손부(孫婦)이고 김창집의 둘째 딸은 민유중의 손부(孫婦)이다.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김제겸의 맏아들)은 목호령의 고변사건으로 역모죄가 씌워져 고문으로 무릎뼈가 부서졌어도 굴하지 않고 26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부조의 은전이 내리고 영의정에 추중되었다.

 임금이 일묘사충(一廟四忠)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시호는 충정이다. 배위는 예조판서 홍만용의 손녀 풍산홍씨이다.

 홍만용은 영안위 홍주원의 아들이다.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홍주원의 어머니는 월사 이정구의 딸이다.


 김창협은 김상헌의 증손이며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이다.

 김창협은 정관재 이단상의 문인이며 나중에 우암 송시열에게 수학했다. 김창협의 배위는 문정공 정관재 이단상의 딸 연안이씨이다. 이단상은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이다.

 김창협은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 문과에 장원하여 대사간, 동부승지, 대사성 등을 지냈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갑술옥사로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 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유학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로 이이보다는 이황에 가까웠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부조의 은전이 내렸다.

 평소 화기가 돌았으나 불의를 보면 기절이 강개하였다. 서울 지역 노론 학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창협, 김창흡의 학문은 이재,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들이 대부분 서울, 경기 지방의 낙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낙학파(洛學派)라 한다.

 김창협은 낙학(洛學)의 종장이다. 김창협이 낙학의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고, 김창협의 문인인 어유봉은 스승을 따라 낙론을 지지했다.

  어유봉의 문하에서 이천보, 홍상한 등이 배출되었다. 이외에도 김창협 문하에는 이재, 이현익, 이재형, 민우수, 신무일 등이 배출되었다.

 이희조는 이단상의 아들로서 일찍 김창협 및 김창흡과 교류가 긴밀했다. 이단상의 문인에 임영이 있다.

 임영은 조성기, 김창협 형제들과 교유했으며 우암 문하에 드나든 소론계 학자이다.


 김창협의 맏딸은 대구서씨 영의정 서문중의 며느리가 되었다. 둘째 딸은 덕수이씨 영의정 이여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여는 대제학 택당 이식의 손자이다. 셋째 딸은 해주오씨 형조판서 오두인의 며느리가 되었다. 오두인은 이조판서 오상의 아들로 숙부 오숙에게 입양되었다.


 김창협의 맏손자 김원행은 김창집의 손자요 김제겸의 셋째 아들로 김창협의 아들 김숭겸이 무후하여 당숙(김숭겸)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운루(雲樓) 등이다. 종조부 김창흡에게 글을 배웠다.

 그 뒤에 김원행은 용인의 한천에 살고 있는 도암 이재 문하에서 오원(吳瑗), 임성주(任聖周), 송명흠(宋明欽) 등과 함께 수학했다. 도암은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洛論) 계열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원행은 낙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학자로서 낙학의 핵심 인물이다. 그가 지키고 있던 석실서원은 당시 낙학의 요람이었다.

 미호는 조야에 명망이 높아 그 문하에 경향 각지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학자로는 그의 아들 김이안을 비롯하여 심정진, 오윤상, 황윤석, 홍대용, 박윤원, 이직보, 조유선 등이 있다.


 김원행의 가학은 김이안에게 전해지고 김이안의 학문은 이안의 아들 김인순에게로 이어졌다. <


김철동 08-01-07 22:23
답변 삭제  
좋은글 감상깊게 읽었습니다.저는 순원왕후의 슬픔을 쓴 김철동 입니다.요즘 인터넷에 올라있는 조상님들 행적을 찾는 재미로 소일하고 있습니다.어렸을적 부모님으로부터 가문에 전해오는 조상님들 기억을 되살리면서 인터넷상의 글들을 봅니다.쓰신 글중에 영안부원군 김조순께서 자하동에 살다가 교동으로 이사했고 교동에서 대를이어 김유근,김좌근,김병기가 살았다고 쓰셨는데 글쎄요?다른 여러분들도 그렇게 쓴글을 보게 되는데 180년전이고 무언가 혼선인것 같습니다.교동은 지금의 경운동이라고 하는군요.종로구 경운동66번지는 하옥 김좌근의집이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면 영안부원군 김조순은 어디에 살으셨을까요?삼청동133번지의 옥호정(또는 옥호산방) 입니다.큰아들 황산 김유근은 옥호정 바로 옆인 삼청동 25번지 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리이고 북악산 백련봉 아래라서 집을 백련사 라고 지었다고 합니다.한때 교동에 사셨는지는 잘모르겠으나 역사적 기록은 삼청동에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작은 기록이지만 바로잡는 의미에서 이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