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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2-14 06:49

族譜僞作件에 對한 小考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684  
 

族譜僞作[족보위작]件에대한 小考[소고]


 족보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양반인정 문제는 지금의 현 상황에서는 판단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의 족보가 제일로 잘되어있다고 한다.

 세계 속에서 인정받은 대한민국의 족보!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허무맹랑한 일 부터해서 여러 모순 덩어리가 넘쳐난다. 누구나 관심을 갖고 상식이 통하는 선상에서 관찰하여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첫째! 개별 문중의 始祖[시조]:

 족보를 구비하고 있는 한국 성씨집단의 대다수가 이 부분에서는 공교롭게도 극소수의 성씨를 제외하고는 僞作是非[위작시비]에 걸려든다.

 事大主義思想[사대주의사상]에 오랜 기간 물들어 있던 터라 시조의 출신지가 中國에 편향되어 있고, 신분 또한 中國의 皇孫[황손]을 비롯하여 대개가 名門門閥[명문문벌]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대다수가 귀족이요, 황족의 신분이었던 것이 된다.

 이러하기에 이 부분은 대다수 문중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되어버렸다.

 선조님들께서 오랜 考證[고증]을 거쳐서 일궈놓은 문중의 귀한 역사를 자손 된 도리에서 왈가불가해서는 안 됨을 족보의 序文[서문]등에 기록하여 후세에 시비가 발생 할 것을 방지하는 계책을 세워놓은 문중의 족보들이 많다.


 둘째! 고려 말 이전의 世系圖[세계도]:

 대한민국의 족보상의 始祖는 멀게는 고조선까지 소급하는 문중이 있으나, 대개는 삼국시대를 시조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족보는 대개 17세기 이후에나 그것도 소수의 양반 성씨문중에서 간행을 한 것 인데 어찌 그 먼 옛날 삼국시대부터해서 고려 말까지의 세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가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一連世系[일련세계: 한 조상에서 한 자손으로 이어짐]로 되어있다. 그 옛날 産兒[산아]제한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多産[다산]을 풍요라 알던 봉건국가 였는데!!!

 조선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많은 문중에서 자료가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수 백 년 전의 조상님들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다.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셋째! 선조님들의 官職記錄[관직기록]:

 족보상의 始祖부터해서 조선조까지의 선조들께서 지낸 略歷[약력]에 대해서 비교적 왜곡없이 기록을 한 족보도 다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족보, 특히나 고려 말 이전까지의 관직기록을 보면 封君[봉군],諡號[시호]를 비롯하여 관직을 하지 않은 문중이 없으며, 그 내용 또한 휘황찬란할 정도로 벼슬이 빼곡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려 말까지의 기록은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시대의 기록까지 허위로 기록한 족보들을 대하다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인 경우를 여러 번 목겼 했다.

 조선조의 공식적인 기록인 문과급제자는 허위가 끼어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여러 문중의 족보에서 문과 급제자를 허위로 기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장원급제하여 영의정, 대제학,,,등 이름만 들어도 확연히 나타나는 사항까지 허위로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버젓이 내밀고 있다.

 180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족보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이때까지는 신분이 그리 유동적이지 않았기에 위작을 하더라도 봐줄만한 정도에서 그쳤다. 본격적으로 족보의 위작이 위세를 떨친 것은 일제 시대이다. 이시기는 이미 구한말부터 해체된 신분제사회가 일정부분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고, 자본의 능력이 있는 씨족집단이라면 얼마든지 족보편찬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시기부터 대량으로 위조된 족보가 6.25동란을 지나고 50여년이란 세월을 보내게된후 다음세대인 6.70년대 세대가 위조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답습한 결과, 지금의 현세대에서 다수의 문중이 족보의 위작문제로 소란을 겪고 있다.


 넷째! 名祖[명조]의 뒤바뀜:

 족보라는 것은 원래 한 문중의 家系[가계]기록을 정리하여 누구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자손들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보여줌에 본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분제사회에서는 이 족보가 그 가문의 家格[가격]을 매김 질 하여 모든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쳤던바, 족보상에 名祖[명조]님들의 많고, 적음이 名文家[명문가]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일제 시대 때 마구잡이식으로 남발되어 간행된 족보들을 들여다보면 타문중의 顯祖[현조]로 명실상부하게 세상에서 공인하여 거론되는 인물이 타문중의 족보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후손들이 이 사실을 그대로 답습하여 뒤바뀐 조상에 대해서 가묘를 만들고 위세 당당하게 석물까지 하여 놓고 자랑스러워 한 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교문화가 가져온 허영의식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족보를 들여 다 보면 여실히 나타난다.


 다섯째! 嫡孫[적손]과 庶孫[서손], 血孫[혈손]과 非血孫[비혈손]의 뒤바뀜:

 이것을 확인하려면 初刊本[초간본]이 있어야 수월하다. 적어도 嫡,庶[적,서]를 구분하여 기록한 보첩이 있어야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조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18,19세기로 내려오면서 양민을 비롯한 상민, 심지어는 奴婢[노비]신분도 재력이 뒷받침되면 하급 양반으로까지의 신분상승이 가능해졌다.

 일제 시대 이후에 나타난 족보상에는 대부분이 嫡,庶를 구분함이 없이 기록하고있다. 단지,기록의 순서만 庶孫[서손]은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1900년 이전의 족보상에 嫡孫이 없어 庶孫을 嫡子로 입적시켜 기록한 경우가 있으나,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일제 시기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조의 뿌리깊은 양반문화를 오래토록 체화시켜 子子孫孫[자자손손] 계승시켜온 문중은 쉽사리 그들의 문화를 버릴 수 없었다. 그만큼 세상의 변화에 적응이 느렸다. 반면, 庶孫[서손],양민, 상민, 노비신분의 계층, 특히나 중인계급[관청의 아전, 역관,의관,,,,]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이들은 자본주의문화에 재빠르게 흡수되고 적응하면서 기존의 기득권층[문벌과 재력을 모두 갖춘 상층양반]을 제외하고는 일반 잔반,향반,등을 경제,정치면에서 추월한다. 이전까지 중,하층신분의 사람들이 이시기에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족보상에 대거 끼어들게 되었다. 嫡,庶 의 뒤바뀜은 그래도 한 아비 소생이니 억울함이 덜하다. 그러나 血孫이 몰락하여 소식이 없는 사이 새로이 非血孫이 자리하고 있을 때면 양상은 심각해진다. 세월이 흘러 친 혈손이 나타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뼈대 있는 친 혈손들은 대개가 근거자료를 갖고 있기에 별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두고두고 시비에 소송까지 가서도 결말이 안 나는 경우가 발생한다.


 여섯째! 가짜와 진짜의 차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있다. 요즘 한창 명품 사기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족보도 마찬가지다. 이왕 양반 족보에 오를 바에야 名祖[명조]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실정모르는 사람들한테 조상자랑 한번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짜는 자부심과 당당함이 배어있다.

 顯祖[현조]의 친 혈손임이 틀림없기에 족보상에 군더더기 같은 내용 붙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전란기에 선조의 내용이 失傳[실전]되었으면 있는 그대로 적는다. 또한 항렬도 굳이 宗中의 宗匠[종장]문중과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기 백년이 지나면 연락도 끊기고 小門中나름의 문화가 태동한다. 이러하기에 한 顯祖의 자손들이라 하여 굳이 족보상에 동일 항렬을 고집하지 않는다. 반면에 중간에 한 성씨라는 이유, 또는 없는 성씨 만들어서 족보에 편입되는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세대가 빈틈없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항렬 또한 宗匠[종장]문중과 한가지로 일치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중간에 편입된 가짜는 선조의 세대를 확인해보면 五世代 이상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개 증조부, 고조부 때까지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짜맞춘 것이 된다. 진짜는 대개 十 世代 이상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조상의 先塋[선영]또한 보전이 잘되어 있다.

 300년 이상의 기록이 제대로 갖춰져 있으면 조선조 봉건국가에서 그 부귀빈천이 어떠했건 간에 나름대로 뿌리 있는 문중으로 평가해도 될 듯싶다.


 일곱째! 終結[맺음말]

 족보를 관찰하다보면 명문가의 족보는 뭔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랜 기간 동안 세상에 드러나 그네들만의 독특한 家格[가격]을 이어왔기에 사람마다 체취가 다르듯이 이들 문중의 사람 또한 氣感[기감]이 범부의 체취와는 다르다.

 많은 족보를 탐독한 족보학자가 아닌 본인이 감히 논하기에는 未便[미편]할 따름이지만, 名不虛傳[명불허전]이라는 名句[명구]가 절로 나올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빠른 문중은 1500년대, 그리고 1600년대에 이르면 다수의 명망 있는 문중에서 보첩간행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문화유씨의 가정보와 풍양조씨 조중운 선생의 씨족원류를 보면서 느낀 점은 현대의 정보화 사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려운 통신 여건 하에서 어떻게 그토록 정밀한 씨족들의 가계를 기록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난다,

 이당시의 기록은 위작된 내용은 없고 다만 당시에 연락이 안 되거나 해서 누락되거나, 오기된 정도라 한다.

 위 두 자료가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다수 문중의 족보간행에 지침서로 작용한 것이다.

 족보는 한 성씨집단의 生死[생사]의 변천사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東夷族[동이족]의 혈연관계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족보를 갖고 문중 간 연결고리를 찾다보면 바로 한민족은 하나가 됨을 알 수 있다.

 조물주가 인간을 세상에 보낼 때 저마다 각기 다른 특성과 재능을 부여하여 보낸 것이다. 그러기에 개개인이 모두 같을 수 없고 나아가 성씨마다의 특성도 각기 다르다. 그리 멀지만은 않은 조선조 중기 까지만도 우리의 족보는 간결하고 문중마다 색다른 향기를 내고 있었다.

 족보문화의 선구자인 대한민국이 오늘날 만연하는 구린내 나는 위작된 족보로 인해서 조상님들께서 고결하게 보전하시어 어렵게 물려주신[ 문중, 나아가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 족보가 더 이상 헛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직하고, 간결하고, 문중의 특성이 살아 숨쉬는 족보문화가 탄생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