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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02 09:17

始祖 墓壇記
 글쓴이 : 김병동
조회 : 1,588  
 

 시조 묘단기 (始祖 墓壇記)



                                        농암(農巖)  창협(昌協)  지음


                                            

                                              병동(丙東:綾夏)  옮김


  시조(始祖) 태사(太師) 김공(金公)은 휘(諱)는 선평(宣平)이며, 신라 말기에 고창 성주(古昌城主)였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적에 공께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군(郡)을 가지고 귀부(歸附)하여 태조가 이를 얻고 나서 드디어 병산(甁山) 싸움의 승리가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의병(義兵)의 성세(聲勢)가 한층 더 고조되어 마침내 견훤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이는 본시 공을 위시한 세 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공훈(功勳)을 책정하는 데 있어 맨 먼저 공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아 다 같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는 작호(爵號)와 함께 태사(太師)라는 벼슬을 내렸고, 고창성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며, 공께서 세상을 마치고 나서 안동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사모하여 안동부의 아문 안에 사당을 짓고 권 태사·장 태사와 함께 제향(祭享)을 받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이 사실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滉)이 쓴〈상공신묘증수기(三功臣墓增修記)〉에 보인다.


  대개 공께서 고창 성주로 계실 적에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다하여서 역신(逆臣) 견훤이 군부(君父)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의리상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했었다.

그러나 공께서 외로운 하나의 성을 가지고 흉폭한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불가능할 경우 고려에 귀부하는 용단을 내려서라도 함께 원수의 적을 섬멸하고 스스로의 의리를 지켜야 할 판이었으니, 이는 마치 장양(張良)이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섬멸하여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은 일과 유사하다.

 이리하여 공의 유풍(遺風)에 격앙된 바, 백성들도 의리에 용감하였다.

이를테면 야별초(夜別抄) 및 홍건적(紅巾賊)의 반란에도 모두 나서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었으니, 이는 더욱이 공께서 한 지방에 덕을 베풀어 놓았기 때문인 만큼, 이 세상 영원히 제향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공의 묘소가 세월이 오래 되면서 그 위치를 잃은 채《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김선평의 묘: 부의 서쪽 옛 태장리(台莊里)에 있다.

'로 보여서 증조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尙憲) 부군께서 일찍이 여러 종인(宗人)을 데리고 산을 두루 다니며 찾다가, 심지어 축문(祝文)을 지어 천등산(天燈山) 신령께 빌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동부 서쪽 10여 리에 있는 태장이라는 산봉우리는 곧 천등산의 왼쪽 가지로서 그 밑에 당동(堂洞)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는데, 이 동네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다들 태사묘 동네라고 일컬었다.

숭정(崇禎:명 의종의 연호. 천계(天啓)?) 병인(丙寅:1626)에 종인 김인(金인) 등이 이 이름을 가지고 찾아서 그 곳에 가보니 신씨(申氏)라는 자가 그 곳에 묘를 쓴 지가 여러 대였고 바로 그 묘의 뒤편 10여 무(武) 거리에 마치 무너진 고총(古 )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계체(階 )의 외곽 둘레를 분간할 만하여 살펴보니 대체로 큰 묘지와 유사한 데다 형국(形局)과 안대(案對)가 또 고적(古籍) 및 시골 부로(父老)들이 기록한 내용과 대개 일치하여 이미 10에 8,9는 입증이 될 만하였고, 또 들으니 신씨가 묘를 쓸 적에 실로 두 개의 고총을 파내어 다른 곳에 묻었고 또 그 계체 밑에서 나온 지석(誌石)과 같이 생긴 돌을 숨겼다고 하여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에 여러 종인들이 서로 나서서 이 사실을 갖추 적어 관가에 고소를 하게 되었고 관가에서 신씨를 체포하여다 심문한 결과 과연 고총을 파내었다는 사실을 자백 받아 즉시 신씨의 묘를 파내었으나, 돌은 끝까지 찾지 못하여 입증할 수가 없는 데다 관가 역시 이 일을 끝까지 추궁하려 하지 않아서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일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자 어떤 분이 말하기를,"우리 태사께서는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 공로가 있어서 이름이 역사에 드러나고 덕택이 향방(鄕邦)에 베풀어졌으며, 자손들이 그 음덕을 입어서 번창하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묘소를 실전하여 장소를 모른 채 몇 백년이 지나도록 묘사를 지낼 길이 없다가, 지금 다행히 진짜 묘소를 찾을 번하였으나 또 간인(奸人)의 도굴로 인하여 묘역이 훼손되고 비석이 인멸되어 마침내 그 사실을 입증하여 봉축(封築)을 가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터지기로서니 조상을 추모하는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전의 제사도 본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린 사례가 있는 만큼, 지금 만약 이 사례를 따라 제단을 쌓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체백(體魄)이 계시는 곳을 상상하여 볼 수 있게 하고 또한 농부나 초동(樵童)·목수(牧 ) 역시 감히 들어갈 수 없게 한다면 예법에 있어 옳을 수도 있소."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무 해 아무 달 아부 날짜를 잡아 동네 안에 땅을 고르고 묘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기로 한바, 공사가 이루어지고 나서 제사를 올리니 종인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로부터 봄가을의 제향을 일체 묘소에 올라가서 거행하는 것처럼 봉행하되, 영원히 준수하기로 약속하고 또 제단 옆에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새겨서 후인들에게 당부하기로 하였다.


 백부(伯父:壽增?)께서 창협에게 명하여 이 사실의 전말을 갖추 적어서 뒷날 입언자의 채록에 대비하라고 하시므로, 삼가 이와 같이 쓰는 것임.

후손 창협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