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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28 10:56

남명 조식의 碑銘(비명)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795  
 南冥(남명) 조식의 碑銘(비명) 박 석 무 연산군은 조선의 열 번째 임금이었다.
 그가 얼마나 무도했고 그의 학정이 얼마나 지독했는가는 세상이 잘 아는 일이다.
 연산 재위 7년이던 1501년은 색다른 해였다.
 바로 그 해에 인물의 보고이던 경상도에서 퇴계와 남명이 태어났다.
 퇴계는 강좌(江左・안동).
 남명은 강우(江右・진주)를 대표하는 당대의 성리학자였다.
 그러한 우연에도 불구하고 두 학자는 편지야 오고 갔으나 끝내 한번의 만남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에 좌우찬성에 이르는 고관대작에 올랐으나, 남명은 과거에 응시도 않아 미관말직의 벼슬을 잠시 했을 뿐 72세의 인생을 지리산 골자기에 숨어 살면서 학문 연마와 제자 양성에 힘쓰다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남명보다 2년 앞선 70세에 삶을 마감했다.
 평생 재야 학자로 헌걸차고 당당하게 살았던 남명, 55세의 노숙한 나이에 고향에서 가까운 단성(丹城) 지역 현감이라는 좋은 벼슬이 내려졌다.
 바로 이 벼슬을 사양하면서 남명의 상소(上疏)가 세상을 울린 기막힌 글이었다.
 “임금님의 어머님(문정왕후)은 깊은 궁궐의 한 사람 과부에 지나지 않고, 어린 임금님은 앞전 임금의 한 사람 고아일 뿐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던 상소다.
 천하를 쥐락펴락 떵떵거리던 문정왕후를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던 높은 기개, 바로 그 점이 남명의 학자적 양심이자 곧은 지조였다.
 남명과 뜻이 가장 잘 맞고 학문 수준이 동급이던 친구는 대곡(大谷) 성운(成運・1497~1579)이었다.
 그는 지리산 골자기에 숨어살던 남명처럼 속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지내던 재야 학자였다.
 아무리 임금이 불러도 응하지 않고 도만 닦고 학문만 연구 했다.
 남명보다 4년 전 태어나 83세로 세상을 떠난 대곡은 남명의 부음을 듣고 애도의 제문을 지었고, 뒷날 남명의 일대기인 남명의 묘비명으로 그의 인간과 학문 및 깊고 높은 철학에 대한 뛰어난 해설을 남겼다.
 
 “하늘이 덕을 주어 (천여지덕天與之德)/
  자질이 어질고 곧았네 (기인차직・旣仁且直)/
  어질고 곧은 몸속에 채워 (감지재신・歛之在身)/
  혼자 쓰기에는 풍족하였네 (자용칙족・自用則足/
  남들에게는 베풀지 않아 (불시우인・不施于人)/
  혜택이 널리 미치지 못 했네 (택미보급・澤靡普及)/
  시대 때문일까 운명 탓일까 (시야명야・時耶命耶)/
  백성들 복록 없음을 슬퍼하노라 (도민무록・悼民無祿)”
 
 연구의 성과와 학문의 업적으로 세상을 제대로 요리하고 나라와 백성을 이끌고 건질 인품(仁)과 능력(直)을 지녔지만 끝내는 어질고 착하며 곧은 성품을 몸속에 숨기고는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지 못함을 슬퍼했던 대곡은 진정한 남명의 친구였고 지기(知己)였음을 보여준다.
 한문 고전의 참맛은 그런데 있다.
 72년 평생을 길고 길게 나열해놓고, 불과 32자라는 운문으로 정리하고 요약하여 압축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고전의 특이한 장점이다.
 남명 같은 학덕이 있었기에 그런 비명이 나올 수 있지만 대곡 같은 그런 문장가가 있었기에 그런 고전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잘못하는 임금과 왕후에게 주저 없이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던 곧은 성품,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과 도만 닦다가 서상을 떠난 남명, 그런 이유로그가 남긴 문집인 ‘남명선생집(南冥先生集)’은 우리 모두의 영원한 지혜의 보고가 되어 준다. (한국고전 번역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