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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7-22 23:03

연안가의 李明漢(이명한) 선생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624  
 

   휴암공(休庵公) 신도비명(神道碑銘)를 선(譔)한

연안가(延安家)의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선생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 김공(金公) 회이(晦而 • 金光煜의 字)씨가 청음(淸陰) 김상서(金尙書 • 金尙憲)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그 선부군(先父君)인 참판(參判) 휴암공(休庵公 • 金尙寯의 號)의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두 집이 代대로 형제의 의리가 있으니 君이, 아니면 우리 先人의 묘명(墓銘)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하므로, 나 이명한(李明漢)이 절을 하고 그 행장을 받았는데......‘


 이상이 선생이 휴암공의 신도비문을 선하게 된 서문(序文)이다.


 선생은 저 유명한 연안가(延安家)의 거두(巨頭)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아들로 1595년 선조 28년에 태어났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16년(광해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자(正字) 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이르러, 앞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휴암공(休庵公)과 같이 참여치 않았다하여 파면 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 후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이 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여  8도(道)에 보내는 교서(敎書)를 지었다.

 여러 조(曹)의 참의(參議),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1639년(인조 17)병조 참의(兵曹參議)・도승지(都承旨)를 거처 1641년(인조 19)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大司憲)・도승지 겸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 1643년((인조 21) 이경여(李敬與) 신익성(申翊聖)등과 함께 척화파(斥和派)라 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해 세자 이사(世子貳師)가 되어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모시러 심양에 갔으며, 1645년(인조 23)에 명나라와 밀통(密通)하는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청나라에 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나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파(斥和派)로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義憤)을 노래한 시조(時調) 6수가 전한다.

 1645년(인조 23) 향년 51에 졸(卒)하니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고, 저서(著書)로 백주집(白洲集)이 전하며, 문헌(文獻)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있다.




                    2008년 7월


                   휴암공파 사무국장 관동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