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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25 12:02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청백리정신
 글쓴이 : 김참봉
조회 : 1,852  
"우리집에 보물은 없다.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지금 이 ‘천자(賤資)’가 천하를 휩쓸고 있지만, 아직 휩쓸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안동이다. 뼈대는 없고 오직 돈만 가진 졸부가 행세할 수 없는 곳이 안동이다. 그 뼈대를 추적하다 보면 수 백년간 면면히 이어져온 이름난 양반 집안들과 만나게 된다. 청렴과 강직으로 존경받았던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1431~1517)의 집안도 그런 집안 중 하나다.

안동 지역에 선비문화를 정착시킨 주역은 역시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퇴계 선생이다. 외래사조인 불교를 이 땅에 토착화시킨 인물이 원효라고 한다면, 중국의 주자성리학을 조선 실정에 맞게 토착화시킨 이는 퇴계이다. 하지만 안동에서 퇴계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백당 김계행 같은 한 세대 앞선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안동 시내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길안면 묵계리가 나온다. 길안천 따라서 묵계리로 가는 길은 산색도 푸르고 물색도 맑아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흔든다. 가히 선비가 거처할만한 동네이다. 마을 이름도 ‘신선이 사는 동네’라는 뜻의 선항(仙巷)이다. 평생 청렴과 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보백당 종택이 자리잡은 곳이다. 

144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32세가 되던 1462년에 성주향교의 교수로 발령 받았다. 요즘 식으로 보면 지방교육담당관 정도 되는 말직이었다. 당시 집안의 장조카로서 불문에 출가한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성주에 들렀다. 조선 초기에 공식적으로는 억불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실의 내부, 왕비나 상궁을 비롯한 여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고 있었으므로 학덕이 있는 승려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학조대사는 당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重創)했으며, 후일 성종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연산군의 비였던 신비(愼妃)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의 대장경 판각을 중창한 궁중 실력자였다. 안동 출신인 학조대사가 성주에 들렀을 때 성주목사에게 “내가 숙부를 좀 뵈러 가야겠다”고 말하자, 목사는 “왕실의 존경을 받는 대사께서 거기까지 직접 가실 필요가 있겠느냐. 이리로 오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목사가 사람을 시켜 보백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관아로 오라고 하자, 보백당은 “공무도 아닌데, 사적인 일로 관아에까지 갈 일이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식을 들은 학조대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 부랴부랴 성주향교로 숙부를 만나러 갔다. 학조대사는 미관말직에서 고생하고 있는 숙부를 도와줄 요량으로 좋은 벼슬자리로 옮길 의향이 없는가 하고 타진했다. 왕실에 줄을 대어서 숙부를 중앙 관직으로 옮길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이야기였다. 보백당은 “너한테 부탁해서 내가 어떻게 벼슬을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되느냐, 우리 집안의 정신이 그것 뿐이란 말이냐. 너,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일갈했다. 보백당은 학조대사를 호되게 꾸짖고 회초리 세례를 안겨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김계행은 1480년 50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5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기 때문에 사임과 취임을 반복해야만 했다. 마침내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와 말년에 짓고 산 집의 당호가 보백당이다. 그는 87세에 운명하면서 자손들을 전부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이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라.” “우리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로지 청백 뿐이다”는 뜻이다. 그의 유언은 조선 선비가 생명처럼 지키려고 했던 정신의 뼈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백당에는 지금도 ‘보물유청백’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보백당의 청백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족보에 올라 있는 남자들만 따지면 그 후손은 대략 8천명. 이 가운데 뇌물 먹어서 교도소에 들어간 후손은 거의 없다는 게 후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특히 공직에 있는 후손들은 ‘보물유청백’이란 가풍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만약 보백당 후손이 뇌물 몇 푼 먹어서 구속되면 이는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문중 전체를 망신 주는 행위로 생각하고 있다.

보백당의 19대 종손인 김주현(73· 전 경북 교육감)씨는 “94년 설립된 보백당 장학재단에도 그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보백당 장학재단에는 ‘청백공무원 자녀 장학금’이 있다. 시청와 군청, 교육청, 경찰서 등 공공기관 공무원 가운데에서 청렴하다고 추천받은 공무원 자녀들에게 주는 장학금이다. 경북도내에 수백개의 장학재단이 있지만 청백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제도로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도 있다. 하지만 자기 후손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고 타성받이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다. 장학재단을 세워서 자기 문중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보백당의 정신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천자(賤資)가 휩쓰는 이 세상에도 청백의 선비정신은 길안천이 감돌아 흐르는 묵계리의 김씨 집안에 면면히 남아 있었다
 
선생은 9세 비안공(휘 三近:비안현감 )의 작은아들이며,10세 판관공(휘 係權:한성부판관)할아버지의 동생으로 정헌공파(定獻公派:보백당파:묵계파)의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