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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1-17 18:32

조선의 왕능과 왕비능 (2)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388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 40基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②

 

태조 이성계와 건원릉

 

급보를 접한 태조 이성계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후일 태종대왕)이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이고 왕조 개국일등 공신들인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철퇴로 주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지니고 다니던 신궁(神弓) 백우전(白羽箭)을 얼른 집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이미 태조는 병이 깊었던 것이다. 1398년 8월 25일, 조선을 개국한지 7년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왕위를 둘째 왕자 방과(芳果․정종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사인 무학(1372~1405)대사와 양주 회암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도대체 임금 자리가 무엇이길래 어린 동생들까지 죽여야 한단 말인가. 내 이럴 줄 알았으면 호랑이 같은 방원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건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걸 어찌 하겠는가’.

얼핏 태조의 독백을 들은 무학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상왕 전하, 부디 마음을 내려 놓으소서. 돌이켜 보면 인간사 모두가 공망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이제부터는 난마같이 얽힌 정사를 모두 잊으시고 남은 여생을 편히 쉬소서.”

이때 둘은 지금의 망우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당시 태조의 나이 65세로 무학은 12살 위인 77세였다. 멀리 검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은 눈빛만 마주쳐도 속내를 꿰뚫는 사이였다.

“이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뭐 바랄게 있겠소. 천천히 죽어 묻힐 신후지지나 있으면 미리 봐둘까 하오.”

이런 연유로 무학과 함께 잡아 둔 자리가 오늘날의 건원릉이라고 전한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74세로 승하하자 태종은 하륜, 김인귀 등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들을 총동원해 능 터를 결정하니 이미 무학대사가 점찍어둔 바로 그 자리였다.

조선왕조는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조성했다. 4㎞를 10리로 잡았으니까 40㎞에 해당한다. 능제를 지낸 임금이 서둘러 출발하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왕릉 가운데 도성에서 100리가 넘는 영릉(여주․세종대왕) 장릉(영월․단종대왕) 융릉(수원․사도세자) 건릉(수원․정조대왕) 등에 얽힌 사연은 그때 가서 쓸 것이다.

정사와 야사를 통해 만나는 태조 이성계의 일생은 파란만장 그대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무인기질로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맹한 장수였다. 역성혁명의 기회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피 흘리며 왕조를 창업했지만, 권력의 정상에서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으로 필부필부(匹夫匹婦)만도 못한 고통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찍이 정적 관계였던 포은 정몽주는 태조를 일컬어 “풍채는 헌걸차고 씩씩하여 화산(華山)의 용골매요, 지략은 깊숙하고 두드러져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다”고 받들었다.

때마침 동구릉을 찾은 날은 100여년 만에 내린 폭설이 계속되는 강추위로 녹지 않아 그대로 쌓여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왕릉 관리가 더욱 강화돼 능상의 촬영은 반드시 관리사무소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땅속에 묻히는 건 다를 바 없다. 여름엔 비 맞고 겨울엔 눈 맞아야 하는 이치 또한 임금이나 평민이나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태조는 한 평생 군인으로 팔도강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지만 늘 함흥 고향땅을 잊지 못했다. 원래 관향(성씨의 고향)은 전주였으나 그의 4대조 안사(安社)가 당시 전주 지주사(知州事)와의 불화로 삼척으로 이주했다. 악연은 이어져 그 지주사가 다시 관동안렴사로 부임해 오자 머나먼 함흥 땅까지 피신해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국경은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닌 철령 일대를 가로지르는 경계였다. 이미 망조가 들어 북원으로 쫓겨 간 원나라는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며 감당 못할 공물을 요구해 왔다. 걸핏하면 쳐 들어와 국경은 수시로 변했다. 태조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며 지방 무장호족으로 고려를 위해 싸우다가 조정에서 홀대하면 원나라로 가 벼슬도 했다. 말 타고 활 쏘며 칼 쓰던 시절 국경을 맞댄 지방 호족들의 일상이었다.

이즈음 황해도 곡산에서 후일 태조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계비 신천 강(康)씨를 만난다. 당시 벼슬아치 들은 고향에 둔 부인을 향처(鄕妻)라 했고 서울에 사는 부인은 경처(京妻)로 불렀다. 특히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들에게는 오늘날의 ‘바람끼’가 아닌 현지 수발자의 조력자 개념이었다. 신덕고황후 강씨는 정릉 편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1335년 화령부(현재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자춘과 최씨(최한기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이성계는 나면서부터 무골(武骨)이었다. 이 무렵 14세기 중반의 중국 대륙은 명의 주원장이 원을 위협하고 만주지역에서는 여진족이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빈번한 노략질로 문관보다는 무관이 우월적 지위에 있을 때다.

이성계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왜구를 섬멸하는 등 국운이 위태로운 전쟁에서 승승장구해 어느덧 고려 조정의 신흥군벌 세력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민왕의 부원군(임금의 사돈)으로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 장군과의 숙명적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둘 사이의 역사적 운명은 위화도 회군으로 판가름 나 최영은 처형당하고 이성계는 조선 임금으로 등극해 태조가 된다.

후일의 사가들은 이 당시 두 장군의 군사적 대결을 두고 아직까지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 후 원나라는 멸망해 자취를 감추었고 신흥세력 명나라는 1644년 망국에 이를 때까지 3백년 가까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처럼 천운을 타고나 왕조를 창업한 태조에게도 시국을 판단함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왕조 개국의 일등공신인 방원을 제쳐두고 어린 방석을 후일의 임금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이때 태조가 계비 강씨와 정도전 등의 소청을 물리치고 호랑이 같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더라면 국초의 조선이 얼마나 평탄했겠느냐는 돌이킬 수 없는 탄식이다. 이로 인해 계비 소생 방번과 방석은 비명에 죽고 조선경국전을 쓴 삼봉 정도전도 절명하고 말았다. 태조가 이 역사를 되풀이한다면 다시 그런 결정을 할까하는 생각이 눈 쌓인 건원릉 입수(入首․산의 정기가 묘지로 들어오는 볼록한 곳) 지점에서 스쳐간다.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산재한 조선 왕릉을 답사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것이다. 왜 건원릉에만 갈대가 무성할까. 능상의 갈대는 태조의 고향 함흥에서 직접 옮겨온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의 흙과 갈대를 이식하라 했고 사초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유언이 6백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6백년 동안 무탈하게 살아 있는 갈대가 경이롭기만 하다.

천하의 무학대사가 잡은 건원릉의 좌향은 무엇일까 궁금해 나경을 펼쳐 들었다. 나경은 패철, 뜬쇠로도 불리며 좌(머리 부분)와 향(다리 부분)을 맞춰보는 나침반이다. 계좌정향으로 서쪽으로 15도 기운 정남향에 가깝다. 능 위의 입수는 축(丑)방향이고 물이 들어오는 방향(得水)은 곤신(坤申․서남쪽)향이며 물이 나가는 방향(破口)은 병(丙․남동쪽)향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천하길지 대명당이다.

연재가 계속되면서 언급이 되겠지만 왕릉과 풍수는 무관하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특히 무학대사는 신라 말의 도선국사→지공대사→나옹선사로 이어지는 한국풍수의 정통맥으로 특히 사찰과 왕릉풍수에 도통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과거시험의 잡과에 속했던 풍수도 재미있게 풀어갈 생각이다.

현재 동구릉에는 왕과 왕비 17위가 안장돼 있으며 궁궐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구릉(東九陵)이다. 조선왕릉 모두가 두 자씩의 능호이나 개국 태조릉에만 석자를 붙인 건원릉이다.

 

<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



태조의 건원릉 혼유석 앞에서 내려다본 정자각. 좌청룡 우백호가 겹겹이 둘러싸인 천하명당 대길지로 무학대사가 잡은 자리다.


 

건원릉 위에서 내다본 조산 . 능상의 갈대는 태조의 고향 함흥 땅에서 옮겨 심은 것이다. 1백년 만의 폭설에 묻힌 6백년 세월의 갈대가 처연하다



  건원릉 뒤의 풍수 입수처. 산 정기를 모아주는 곳으로 명당에서만 볼 수 있는 병목 지형이다.


(아래 글과 사진은 본회 월보 김관동 사무국장이 필자와 동행하여 촬영한 게재물입니다.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능능입구에 있는 태조(이성계)의 詩碑(시비)

압록강에서 읊은 시로 이 때 이미 역성 혁명의 포부가 깃드려 있음





동구능 안내 지도




홍살문이 능역임을 표시하며 잡인의 근접을 막는다



영의정 河 崙(하 윤)의 지기로 함흥에 있는 갈대를 전국의 장정을 부역하여 양팔 넓이로 세운 후 함흥에서 양주까지 옮겼다는 함흥 갈대 능봉임.
임진왜란때는 이 갈대가 창을 세운것 같이 보여 왜병이 능의 침범을 막았다고 함.



능 위에 있는 적송 가지가 능을 호위하는 양, 긴 팔을 벌려 잡인의 접근을 막는것 같다




경기지방에 103년 만에 내린 눈으로 건원능 병풍석에 열린 고드름이 瑞雪(서설)을 난끽하기에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