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31.(금요일)
구랍(舊臘) 30일자로 안동 소산에 있는 청원루가 국가보물 제2050호로 지정을 받은 해를 넘겨 시조묘단에 고유하고 청원루를 찾아보기 위하여 서윤공파(회장 鵰漢)을 위시하여 관동(官東)부회장, 권진(權鎭) 사무장이 홍진(弘鎭) 전임 회장을 뫼시고 아침 8시에 지하철 1호선 신길역 주차장에서 모여 안동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새로 난 평태제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천둥산 휴게소에서 잠시 쉰 다음 남제천에서 중앙고속도를 이용하여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시조 태사공 묘단에 고유제를 올리었다.
고유축문은 다음과 같다.
太師墓壇 淸遠樓 寶物指定 告由祝文
西紀 二千二十年 一月 三十日 二十七代孫 鵰漢은 삼가 始祖 太師公 靈前에 告하옵니다.
昨年 己亥 十二月 三十日字 文化財廳으로부터 安東 素山에 있는 淸遠樓가 國家寶物 第二零五零號로 指定되는 榮光을 받았습니다.
이는 始祖이신 太師公의 하늘같으신 보살핌과 加被力의 所産이라 여기옵니다.
이에 榮光된 寶物指定을 告하면서 微誠이나마 敢히 薄酒素饌으로 參拜하오니 歆饗하시옵소서
신년 성묘겸 고유례를 올리고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에 있는 청원루로 차를 몰았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숙동(淑東) 안동화수회장을 비롯하여 요한(堯漢) 부회장, 그리고 청원루 바로 앞에 거주하는 삼당공파의 득년(得年)씨와 수인사를 나누었다.
청원루를 돌아보며 1998년 10월 대종중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던 귀년(貴年)씨가 세운 비석으로 서예가 여초(如草) 응현(膺顯)씨가 찬하고 쓴 ‘淸陰先生과 淸遠樓’ 비문을 살펴 보았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淸陰先生은 宣祖三年 庚午 西紀 一五七零年에 生하시어 孝宗三年 壬辰에 卒하시니 諱는 尙憲 字는 叔度요 號는 淸陰 石室山人 西澗老人이라하니 安東金氏 十五世이다.
先生은 進士庭試 文科重試에 合格하여 湖當에 뽑혔고 文衡을 맡았으며 淸白吏에 들었고 耆社에 들어 机杖을 받았다.
仁祖十四年 丙子 西紀 一六三六年 南漢山城에 扈從하여 和議를 排斥하였다.
仁祖十八年 庚辰 西紀 一六四零年 淸에 拘拿되어 瀋陽西獄에서 苦楚 七年만에 還國하여 議政府左議政으로 孝宗三年 壬辰 西紀 一六五二年에 卒하시니 享年 八十三으로 贈領議政 文正이라 諡하였다.
伯氏 仙源先生은 諱 尙容으로 明宗十六年 辛酉 西紀 一五六一年에 生하시어 仁祖十四年 西紀 一六三六年 丙子에 卒하시니 胡亂으로 江華에서 殉節하셨으며 先生은 南漢山城에서 降書를 찢고 下城을 목숨으로 抗拒하다 뜻을 이루지 못함에 이곳 淸遠樓에 隱居하였다.
이곳은 本是 先生의 曾祖 平壤庶尹 諱 璠 成宗十六年 己亥 西紀 一四七九年 生하시어 中宗三十九年 甲辰 西紀 一五四四年에 卒하시니 公의 舊居였다.
先生이 仁祖十五年 丁丑으로부터 仁祖十八年 庚辰에 이르는 동안 豊山 西薇洞에 木石居 講麟堂 西澗草堂을 지어 後學에게 講學하였다.
道學 文章 節義는 爾後 우리 民族正氣의 砥柱로서 永遠히 굳혀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곳을 中心으로 햇살처럼 퍼져 民族精神을 굳건히 支撑하여야 할 民族聖地로서 全體民族의 崇仰儀表라 하겠다.
바로 東쪽의 三龜亭은 孝道의 根本을 表象하고 이곳 淸遠樓는 忠義의 核이 集結된 根源이라 여기에는 忠과 孝가 함께하는 民族敎訓의 본보기라 하겠으나 千萬年 後世에 까지 그 生命은 永遠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先生의 同宗에게 알리는 詠始祖 太師事示 同宗諸君이라는 詩와 淸으로 拘引 되실 때의 斷腸의 時調를 새겨 뜻 깊은 바를 잊지 않도록 銘心케 한다.
十四代孫 膺顯 謹識 幷書 十五代孫 貴年 謹竪
檀君紀元 四千三百三十一年 十月 日立
오후 1시가 되어 풍산읍에 있는 한우촌 식당으로 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안동을 출발하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동서울 톨케이터로 오다가 분당으로 좌회전하여 국도를 타고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등나무집에서 족탕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밤 8시가 거의 된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