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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5-03 06:22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추모문학제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32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추모문학제

2022. 4. 30.(토요일)

 

평양감사(平壤監司)를 읽을 때는 피양감사로 읽어야한다.

우리속담에 피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팔도감사 중에 피양감사가 제일 좋았다는 말이며 다른 감사는 정삼품 통정대부나 종2품 가선대부였으나 피양감사만 정2품 자헌대부가 역임 하던 자리였다.

그리고 오늘 추모제가 열리는 운초 김부용과 연천공 휘 이양(履陽)선조와의 러브스토리는 피양감사의 대명사가 되리만치 일반에게 회자되기로 하여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근대 대하소설의 최고봉이었던 월탄 박종화 선생이 쓴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송강 정철과 프라토닉러브를 그렸던 강아와의 사랑에 스토리마저도 이 피양감사와 운초의 이야기를 모방하지 않았나 사려해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천공은 피양감사를 하시지 않았으며 피양감사가 아닌 함경감사를 하신 것으로 실록에 되어 있으며 평양감영의 선생안(先生案)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일설에 의하면 운초와의 만남은 순조 30(1830) 연천공이 평양에 가셨다가 운초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때의 연세가 76세시였다.

오늘의 주인공 운초는 평안도 성천 기생 김부용(金芙蓉)으로 출생년월일이 정확하지 않고 순조 초인 1800년 초에 출생한 것으로 본다.

기명은 추수(秋水)라고 하는데 부용 역시 기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혼 후 당호로 운초(雲楚)를 사용했다

운초는 본래 양반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때 집안이 몰락하여아버지가 고을 아전 일을 해서 간신히 먹고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딸을 기생으로 보내기까지 한 것이다.운초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출중하였다

운초에게 글을 가르친 사람은 바로 삼촌이었다

삼촌은 유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와 의학에도 출중했고 운초는 그런 삼촌의 재주를 모두 전수하여 소지하였던 것이다.16세 때에는 성천에서 열린 백일장에 나가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어린 기녀가 장원을 하자 사람들이 운초를 가기켜 설교서라고 칭찬했다

설교서는 당나라 명기 설도를 가리키는 말로설도는 문장이 뛰어나 조정에서 비서성의 교서랑에 임명코자 한 일이 있었다

그만큼 운초의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다는 칭찬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운초가 시를 잘 짓는다는 걸 고깝게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운초는 동네 소년들.... 특히 양반가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시를 지으라는 강요를 받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사뭇 분위기가 흉흉했으나 운초는 시운을 불러주는 대로 시를 읊어서 매번 곤경에서 벗어나곤 하였다.운초는 성천 일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 잘 짓는 기녀로 이름을 날렸다

이 시절에 함경감사를 역임했던 연천공 휘 이양(1755~1845)선조를 만났던 모양이다

두 분은 시로 교류를 시작했던 것 같다.운초가 명성을 날린 시에는 층시(層詩)라는 것이 있다

문자탑보탑시라고도 부르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것을 매 연마다 한 글자씩 늘려가며 지은 시다

애절함과 그리움이 가득 배어있는 시다.운초는 문재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미모 역시 뛰어났고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운초가 지은 <희제(戱題)>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1825년에 운초는 한양을 다녀왔다

연천공을 만나는 일 말고 운초가 한양을 다녀갈 일이 없을 것인데 한양에 아예 눌러 앉지 못하고 되돌아온 사연이 무엇일지 알 수는 없다

아무래도 양반이 관기를 데려와 첩을 삼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현직 중신인 연천공에게 쉽게 결심할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연천공은 승진을 거듭하며 판서직(이조, 예조, 호조)까지 지내고 1826년에 은퇴하여 신하로서는 최고의 전관예우인 봉조하(은퇴한 원로 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가 되었다.하지만 성천에서 살고 있던 운초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운초는 1830년에 평안도 구성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었다

귀양 간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운초가 남긴 시에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귀양을 오게 되어 부끄럽다는 내용이 있다

운초는 연천공을 그리워하며 귀양 생활을 버텼다.운초의 불행한 처지가 연천공에게 전달되었을까

다음해에 연천공은 운초를 불러들여 소실로 삼으셨다

연천공의 본부인이시었던 정경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연천공은 후처를 구하지 않고 운초를 불러들여 아내 역할을 맡겼다

이때 연천공의 나이는 77운초는 확실치는 않지만 서른 정도였다.운초는 한양에서 경산금원경춘죽서 등의 여인들과 시회 활동을 했다이 시회를 ‘삼호정시사라고 불렀다

주로 양반가의 기생첩들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 역시 연천공의 후원 하에 이뤄졌던 것이다.이 두 분 사이는 나이를 떠나 시를 즐기는 동료로서의 즐거움까지 가지고 있었다

운초가 결혼 생활을 읊은 시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운초는 연천공과 15년을 같이했다.

1845년 연천공이 세상을 뜨자 운초는 자기 소리를 알아줄 이 없으니 거문고 줄을 끊었노라고 비통해 하며 육신과도 같았던 거문고를 멀리하였다

그 후 운초는 먼저 간 남편을 그리며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운초가 쓴 <스스로 위로하며>라는 시는 어쩌면 연천공이 죽은 뒤 운초의 모습을 읊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첩은 첩인지라 사후에 남편과 같이 묻힐 수 없었고 문중의 묘역에서 떨어진 곳에 쓸쓸히 홀로 누워있게 되었다

운초의 무덤은 1977년 소설가 정비석이 글을 쓰며 이곳 광덕산 자락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오문의 선조분들을 기리는 축제가 이제 세 개가 되었다.

금년으로 25회를 마지하는 영월 김삿갓 축제는 난고(蘭皐) 병연(炳淵) 선조를 기리는 축제이고, 13회를 마지 하는 충남 대덕 동춘당 에서 열리는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가 있으며 이제 이곳 충남 천안에서 운초 김부용 추모문학제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안동김씨 서윤공파 종회에서 축제의 연락을 받고 조한(鵰漢)회장님을 뫼시고 임원진에서 승용차 한 대에 동승하여 아침 730분에 문래역을 출발하였으나 연휴로 지체 되는 바람에 11시를 넘어 도착하여 차를 파킹하고 축제장으로 오르다가 마침 개회를 마치고 내려오던 박상돈 천안시장을 만나 수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운초 묘에 도착하니 기념행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조한회장님의 재종여동생인 희한(希漢)여사가 천안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어 일행을 안내하여 고마웠다.

행사를 마치고 광덕사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하면서 운초 김부용 할머니를 기리는 자리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