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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6-28 04:41
백담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23  

백담사 만해 한용운 기념관

2022. 6. 20.(월요일)

 

수십개의 s코스를 곡예운전하며 도착한 주차장에서 내려 대담사로 가는 큰 다리 밑에는 수천개의 돌탑으로 채워진 진풍경을 보면서 건너가 백담사로 들어가니 오른편으로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님의 침묵이라는 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만해 스님은 민족 시인이다.

하지만 선생의 시 세계를 보면,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시대배경, 사회상황 등을 모두 고려해 보면 그는 단지 시인뿐이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그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은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도 하고, 절대자인 부처에 대한 그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지 서정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노래하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시인이었고, 그의 절대자인 부처에 대한 스님으로서의 시인이었다.

만해 기념관은 1997119일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내에 개관하였다.

3·1운동과 옥중투쟁, 계몽활동, 문학활동, 신간회활동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한눈에 만해의 일생을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그리고 기념관 밖에는 만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조각된 만해시비와 만해두상 조각이 있으며, 백담사 내에는 만해당·만해적선당·만해교육관 등 만해 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다.

만해 한용운은 18798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마침 내려오는 길목에 선생의 대표시인 님의 침묵이 시비로 세워져 있어 온몸에 전륜을 느끼며 읆어 보았다.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희망의 문학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