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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1-14 19:36
11세조 장령공 휘 영수(永銖) 묘소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39  

11세조 장령공 휘 영수(永銖) 묘소

2022. 11. 2.(수요일)

 

판관공 휘 계권 선조의 묘에 성묘를 하고 아래로 내려와 오른편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장령공 휘 영수 선조의 묘가 후손들 산소 위에 자리하고 계시다.

공의 현조는 사치사공[(事致仕公) 정의대부 판예빈시사치사 근중(斤重)]이고, 고조는 전농정공[(典農正公) 중현대부 전농정 득우(得雨)]이며, 증조는 합문봉예공[(闔門奉禮公) 통사랑 합문봉례랑 혁()]이니, 할아버지는 비안공[(比安公) 비안현감 삼근(三近)]이요, 아버지는 판관공[(判官公) 한성부 판관 係權(係權)]과 어머니는 공인 예천권씨[(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재평공(齋平公) 맹손(孟孫)의 따님)]56녀 중 5남으로 학조(學祖)국사 영형(永衡)과 사헌부감찰 영전(永銓), 진사 영윤(永勻),수원부사 영추(永錘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여 음보로 의금부 도사에 발탁 되어 성종 6(1475) 1022일 열무(閱武) 할 때에는 짐승을 잡은 의금부 도사 김영수(金永銖) 등에게 각각 활[] 1()을 하사 받았으며 성품이 민첩하고 모든 사무에 능숙하여 옥사를 잘 처리 하였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주위에 명성을 얻어 사헌부감찰 * 상주판관 * 경주판관을 지낸 뒤 중국사신이 왔을 때 도감랑(都監郞)이 되어 잘 접대하여 명예를 높이었고, 의금부경력 * 도총부사 * 중추원도사를 역임 한 뒤 영덕(盈德)현령으로 있을 때 벽지 * 해지(海地)의 수령들이 나태하여 그들을 징계하고 엄정하게 하여 거만을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다.

이어 선공청 * 장령 * 성의원옹 * 통례원통례를 거친 뒤 영천군수 때 연산군 원년(1495) 224일 딸의 성혼(成婚)이 있었다.

모친 예천권씨의 연세가 80세를 넘었었는데, 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삼구정(三龜亭)를 지어 놓고 매양 좋은 날, 좋은 계절에는 모친을 견여(肩輿)에 모시고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면서 날마다 구경하고 즐기며 봉양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향리에서 영화롭게 여겼다.

연산군 2(1496) 병진에 모친의 상을 당하니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몸이 여위었으며, 3년 복()을 벗자 조정에서 서북 방면의 온 도()가 쇠잔하고 피폐하였다 하여 공을 정3품의 직질로 기용해 금교도(金郊道) 찰방을 삼았다. 이 해에 큰 홍수가 져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공이 공용(公用)을 쓸 것이 부족하다고 임금께 아뢰자 쌀 3백 석()과 소금 1백 석을 내리어 졌으며, 그 후 사어위기음율(射御圍祺音律)을 잘 하였으며 팽임공장(烹飪工匠)때는 음식을 삶는 일을 잘 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연산군 8(1502)년 임술 712일 임지에서 향년 57세에 졸하였다. 조정에서는 미두(米豆)와 종이를 부조(賻助)하고 또 예관(禮官)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을 받들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듬해 3월에 선대묘소의 백호등(白虎嶝) 묘원에 장사를 지내었다.

배위는 숙인 강능김씨로 문종 2(1452)년 임신에 태어나, 중종 15(1520) 경진 61769세에 졸하였다. 아버지는 현령 박()이고, 할아버지는 포천감무 종남(從南)이며, 증조는 전공판(典工判) 서추(書錘)이니, 외조는 현감 유진()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슬하에 36녀를 두니, 1남은 이조참의 영()이고, 2남은 평양서윤 번()이며, 3남은 형조좌랑 순()이다. 1녀는 참의 김정손(金廷孫)으로 삼척인이고, 2녀는 증참의 김유(金儒)로 해풍인이며, 3녀는 통정 금원수(琴元壽)로 봉화인이니, 4녀는 병사 김윤종(金胤宗)으로 안동인이요, 5녀는 별좌 안임(安恁)으로 죽산인이고. 6녀는 진사 이수남(李水南)으로 벽진인이다.

이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 서쪽 10리 되는 소요산(素耀山=金山이라고도 한다) 뒤 역동 판간부군 조우(兆右) 유좌묘향(酉坐卯向) : 정동향)에 있고, 묘갈은 대제학 성현(成俔)이 찬하였고, 진사 홍언국(洪彦國)썼다. 년구제절(年久儕折) 후손 판서 이재(履載)가 본관(本官)에 안무시(按撫時)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부탁하여 글을 받고, 영돈령 조순(祖淳)이 추식(追識)하고, 봉조하 이양(履陽)이 쓰고, 우의정 이교(履喬)가 전()하였다.

배위의 묘소는 판관공의 묘소와 같이 부군(府君) 조후(兆後)에 계시다.

묘소 앞에서 간단하게 제물을 진설하고 전임 서윤공종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홍진(弘鎭) 고문께서 무축 단배로 헌주를 하고 일행들은 모두 성묘로 참배의 예를 올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