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달항아리

 먹고 살 수 있는 항산(恒産)만 있으면 세상에 나가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이해된다.

 50대 후반이 되니까 세상이 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쟁이 심해서 정권 바뀔 때마다 여당 갑조와 야당 을조가 교대로 서로를 죽이고 고문하고 감방에 집어넣었던 조선조 중·후기.

 이 시기의 선비들은 은둔 생활을 동경하였다.

 요즘은 미국이나 캐나다·호주로 이민가는 방법을 택하겠지만, 조선조에 항산 있는 선비는 정원을 조성해 놓고 그 안에서 살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호남에서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 그리고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의 백운동(白雲洞) 정원이 은둔자의 로망이었다.

 나는 매년 이른 봄 동백꽃을 보러 백운동 정원을 찾아가곤 하였다.

 박태후 화백의 초당이 백운동 정원 바로 밑에 있는데, 그 초당의 수백 년 된 동백 한 그루가 나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초당 너머의 백운동 주변은 동백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동산이다.

 백운동은 동백원림(冬栢園林)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래된 동백나무가 많다.

 백운동 정원 뒤로는 월출산의 남쪽 측면 봉우리들이 수십개의 촛대처럼 아니 불꽃처럼 솟아 있다.

 소만물상(小萬物相) 같다.

 금강산이 '대만물상'이라면 월출산은 '소만물상'이다.

 대(大)는 멀고 소(小)는 가깝다.

 월출산의 바위들은 강하고 단단하다. 바위가 단단할수록 기운도 강하게 밀려온다.

 바위가 강하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화기를 누그러뜨린다.

 백운동 정원은 옆에 자연계곡이 있다.

 이 계곡물을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술잔을 돌릴 수 있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시설을 만들었다.

 술잔을 돌리면서 수화(水火)의 균형을 맞추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한 인물은 처사로 살았던 이담로(李聃老·1627 ~1701)이다.

 깐깐한 인물이었던 다산 정약용도 백운동 정원을 보고 찬탄하였다.

 제자인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라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고, 자신도 이 정원의 12경치를 찬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담로의 12대 직계 후손이 화가 이종헌(52)인데 옻칠 전문가이 기도 하다.

 그가 이번에 서울 학고재화랑에서 '옻칠 달항아리' 전시회(漆色有感)를 열고 있다.

 달항아리는 원래 은은한 흰색이다.

 여기에다 옻칠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다.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짙은 갈색이 나오기도 한다.

 '왜 달항아리에 옻칠을 했냐?'고 물으니까 '중국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나온다.

 세월이 흘러 백운동에서 옻칠이 나왔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