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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1-08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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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냐 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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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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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냐 용이냐
인간을 정의해
"두발 달린 털없는 짐승
(無毛二足動物)"
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인간의 특징을 잘 살린 정의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철학자 하나가 닭 한마리를 삶아 털을 모두 뽑은 다음 그 철학자 집에 내던지면서 말했다.
"여기 당신이 말하는 인간이 있소. "
이 삽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을 외모로 정의하려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달마처럼 수족이 없어도 오히려 인간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을 상징의 동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다.
꼭 1백년 전 20세기가 처음 시작됐을 때 지식인들이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해 전망한 기사들을 보면 인간이 정말 상징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계기술에 관한 것은 거의 다 적중시킨 데 비해 상징기술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빗나간 예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미래에는 동물과 인간이 대화를 할 수가 있게 되고 각 대학에는 영어.프랑스어를 가르치듯이 개 말이나 고양이 말들을 배우는 학과가 생겨날 것이라는 전망 등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웬만한 잔 심부름들은 개나 고양이들이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대두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의 상징능력과 그 기술의 발달은 인간 고유영역으로 남아 있다.
컴퓨터와 통신기술 등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간단히 뛰어넘고 있지만 언어만은 여전히 높은 장벽으로 남아 있다.
컴퓨터는 하드이건, 소프트이건 날이 다르게 변모하고 있지만 언어를 입력하는 자판은 어떤가.
19세기 때의 타자를 칠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대체로 사람들은 새 천년을 예견하는 데 있어 과학기술의 변화를 토대로 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상징의 숲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변화들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2000년이라는 숫자의 변화와 분절 자체가 상징의 문제이지 자연이나 갑작스러운 기술의 도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2000년이라는 연수에서 상징성을 빼놓으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른바 밀레니엄은 또 하나의 버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2000년에 어떤 상징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안데르센의 발가벗은 임금님처럼 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나 윤리.도덕이란 실질이 아니라 환상의 직물이요, 허구의 옷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상징적인 힘이나 그 약속을 모르는 아이(하나의 문화권 밖에서 살고 있는 존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상징의 옷은 사라지고 발가벗은 임금의 알몸만 남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안데르센의 발가벗은 임금님은 상징적 가치를 유물적 가치로 바꿔놓은 산업사회 물질주의를 반영한 동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구렁이와 용에 대한 옛날 이야기는 다르다.
홍수가 나 사람들이 물 구경을 하고 있는데 마침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그때 군중 속에 있던 아이 하나가 그것을 보고 "용이다" 고 소리질렀다.
그 순간 구렁이는 정말 용이 돼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구렁이를 보고 용이라고 외친 아이는 안데르센의 아이와 정반대의 일을 한 것이다.
유물적인 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름짓기의 상징적 행위에 의해 인간은 구렁이를 용이 되게 한다.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용은 상징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짐승이지만 그동안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왔는가.
때로는 통치의 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풍요의 비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용이라고 해도 서양의 것은 인간을 해치는 악룡(惡龍)
이고 동양의 그것은 풍요와 상서로운 영물로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이러한 상징 양식의 차이가 바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낳기도 했다.
2000년은 달력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
세상에는 그 상징성을 창조하고 키워가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그것에 찬물을 끼얹고 알몸으로 벗겨내는 물질주의자가 있다.
그 마음에 따라 우리의 새 천년은 용이 될 수도 있고, 구렁이가 될 수도 있다.
이어령 <새천년준비위 위원장>
2002.02.23 12:13 입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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