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커피 수요가 급증하자, 커피를 수출하던 예멘의 유대 상인들은 커피를 독점 공급하려고 커피의 수출 항구를 한 곳으로 한정했다. 그곳이 아라비아반도 남단의 모카 항구였다. 예멘의 유대인 수출상들은 다른 지역에서 반출하는 일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모카에서만 수출했다. 그 무렵 예멘을 중심으로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유대인 3만명가량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당시 커피는 매우 비싼 상품이었다. 그 뒤 모카의 유대인들은 무려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이렇게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커피 자루에 모카 글자가 크게 찍혀 유럽 각지로 수출되다 보니 유럽 사람들은 커피를 모카라 불렀다.
아랍은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커피나무 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커피가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없었는데도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나 기후 조건 때문에 아라비아 땅 이외에서는 커피가 잘 자라지 않았다. 그 무렵 서구 커피의 독점 수입을 주도한 사람들 역시 유대인이었다.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그들이다. 당시 교황이 기독교도의 이슬람 접촉을 금해,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근대 들어 유럽으로 커피를 처음 대량 수입하기 시작한 것은 유대인이 주도하여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이 이야기는 ‘인도판 문익점’에서 비롯된다.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1600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에 들러 그곳 커피 농장에서 종자 몇 개를 몰래 갖고 인도로 돌아왔다. 이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카나타가에 심어 재배에 성공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황금 알을 놓칠 리 없었다. 1616년 인도에 커피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인도로 밀파한다. 스파이는 인도에서 커피 원두와 묘목을 밀반출했고, 네덜란드로 건너온 커피 묘목을 따뜻한 식물원 온실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커피는 특성상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서 자란다. 이를 ‘커피벨트’라 부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1658년 커피 묘목을 적도 부근 스리랑카(실론)로 가져가서 대규모 농장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커피나무는 1670년 해충 때문에 다 죽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재배 장소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본거지인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마침내 1696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바타비아에서 해충을 이겨내고 대규모 커피 농장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커피를 최초로 대량 재배하기 시작한 곳은 중남미가 아닌 아시아였다.
마침내 유대인들이 커피 재배와 교역을 동시에 주도하게 되었다. 그 뒤 70년 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대량 재배했다. 1740년에는 커피 재배지가 자바에서 필리핀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커피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음료가 되었다.
1800년대 들어 커피 수요가 늘어나자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도 돈 되는 커피, 사탕수수, 인디고(염료)를 강제로 경작시켰다. 그리고 이를 거둬들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그 수익은 1850년대 네덜란드 재정 수입의 30% 이상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갖고 운하와 도로를 건설했다. 반면 커피 생산국은 경제적으로 힘들게 된다. 커피나무는 옥토의 지력을 빨아먹고 크는 작물이라, 커피 농장 땅은 7~8년이 지나면 죽은 땅이 된다. 원주민들은 당장 돈이 되는 커피 재배에만 힘을 쏟다 식량 재배를 못 해 결국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중남미로 퍼져 나간 커피 농장
커피 생산의 선두 주자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했다. 1715년에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 묘목을 가이아나(Guyana)에 옮겨 심음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에 커피나무가 최초로 전파되었다. 이후 수리남과 카리브해의 식민지로 옮겨 심어 커피 재배에 성공했다.
한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사연은 로맨틱하다. 프랑스령 가이아나의 총독 아내가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 나갔다.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보낸 커피는 최상의 재배 조건에서 잘 자라 두 나라를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커피 생산국, 소위 ‘커피 벨트’는 주로 적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반면, 소비국은 대부분 북반구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멀리 떨어진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를 이어주려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유대인 특유의 독과점 체제를 구축했다.
이렇듯 커피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네슬레를 유대인 앙리 네슬레가, 스타벅스를 유대인 하워드 슐츠가, 3세대 커피라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테리젠시아와 스텀프타운은 유대인 요한 아담 벤키저가 탄생시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英서 ‘토론의 場’ 자리잡고 佛서 카페문화로 꽃피웠다]
유럽 최초 카페는 1629년 커피가 처음 들어온 관문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다. 이어 1650년 유대인 제이콥(야곱)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옥스퍼드 대학 도시에 열었고 1652년에는 런던에 ‘파스카 로제’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 뒤 ‘커피하우스’는 대영제국을 지배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술을 즐긴 영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덕분에 카페 수가 선술집을 넘어섰다. 런던 사람들이 ‘동전 대학’(Penny Universities)이라 부르면서 카페는 싼값에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카페 문화는 프랑스가 선도했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혁명 사상과 예술혼이 카페에서 무르익었다. 1880년 무렵 파리에만 카페가 약 4만5000곳 있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