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공은 이 금표비의 서슴없는 해석으로 인하여, 처음 병연을 대할 때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그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단종 대왕께서 쌓았다는 탑으로 가시지요."

노사공의 말소리가 부드러웠고 존대 말로 변했다.

그는 서북쪽 언덕으로 올라 아무렇게나 쌓은 돌무더기에 가더니 발길을 멈추었다.

"이 돌무더기는 단종 임금이 이곳에 오를 때마다 주위에 흩어진 돌을 주어서 쌓은 망향탑이라고 합죠."

병연은 노사공의 말을 듣고 주변을 살폈다.

돌탑 북쪽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 층암절벽이 발길을 잡았고, 검푸른 서강의 물줄기가 수십 길 낭떠러지 발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낭떠러지 위의 "망향탑(望鄕塔)"은 단종의 손길이 닿은 유물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어느 누가 이 외진 벼랑 위에 와서 돌을 주어 쌓을 리가 만무했기 떄문이다.

"정말 원한이 맺힌 돌탑이군요. 자신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저 아래의 소나무 숲속에서 이곳에 올라 한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그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그리워, 어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올랐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돌을 하나씩 주어 와서 이곳에 쌓으면서 부인의 무사안녕을 빌었겠지요."

"바로 보았구만요. 젊은 선비님."

노사공은 선비님이라고 존칭하면서 건너편 벼랑 위로 솟은 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쪽 벼랑 위로 보이는 봉에도 자주 올랐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 봉을 노산대(魯山臺)라고 부르지요."

"그곳 역시 한양 하늘이 잘 보이겠군요?"

"아무렴요. 이곳보다 전망이 더 틔였지요."

노사공은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돌아서 소나무 숲속으로 내려왔다.

그는 소나무 중에 두 갈래로 자란 소나무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이 소나무는 사람들이 관음송이라 부르는데 수령은 400년이 넘었다고들 말하지요.

귀양생활을 하던 어린 임금이 자신의 앞날을 에측할 수 없는 근심으로 이곳에 와서 두 가닥 나무 사이에 앉아서 수심에 쌓인 얼굴로 구슬픈 두견새 소리를 들었답니다."

"네. 그런 사연이 담긴 나무군요. 아마도 관음송(觀音松)이란 이름은 그 당시 이 소나무가 단종의 수심에 쌓인 비참한 모습을 보고 관(觀), 단종 임금의 한 맺힌 절규의 음성을 들었음으로 음(音), 그 모든것을 들은 소나무 송(松)을 이름 하여 관음송이라 했군요."

병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당시 이곳에서 단종 임금의 눈물 맺힌 시를 떠올렸다.

청령포에서 홍수로 인해 관풍헌으로 옮겨지자 단종은 동편에 있는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는 두견새의 한을 담은 자규시(子規詩)와 자규사(子規詞)를 떠올렸다.

단종 임금이 죽임을 당하기 며칠 전 이곳 매죽루에 올라 읊었던 시였다.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 한마리 원한 맺힌 새 궁중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 짝 잃은 외로운 몸 깊은 산중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 수없이 해가 가도 원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 두견이 울음 끊긴 뫼 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漏春谷落化紅(혈루춘곡낙화홍 : 피를 뿌린 듯 봄 골짜기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來聞哀訴(천롱상래문애소 :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 어찌하여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게 하는가.)

단종 임금은 죽임을 당하기 전 관풍헌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우는 두견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자규사와 자규시를 썼다.

이로 인해 훗날 이 매죽루의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병연은 자규시를 읊고 나서 까마득히 솟아오른 관음송을 올려다보았다.

소나무 가지사이로 반짝이는 햇빛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는 청령포와 단종의 환상에서 깨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늘 백일장에서 글을 겨룬 것과 그 글의 당락을 발표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머리에 떠올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