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마지막으로 우전과 헤어져 한낮이 훨씬 지나서야 광나루에 도착했다.

처음 이곳에서 지금껏 지내온 학우들과 만나 청운의 꿈속으로 빠져든 것이 어제 일같이 새로워졌다.

공교롭게도 우리 일행이 서로 만났던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술잔을 돌리면서 흥겨움을 과시했다.

병연은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보면서도 천렵이든 시회를 하든 전혀 관심 밖이었다.

지금 그의 심정은 한시라도 빨리 한수를 건너 서울과의 거리를 멀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병연은 곧 떠나려는 나룻배에 잽싸게 올라탔다.

그가 2년 전 이곳을 건너올때와 지금의 뱃길은 천지차이였다.

그는 배에서 내려 곧장 광주를 향해 걸었다.

어디쯤엔가 나지막한 언덕을 넘으니 눈 아래 넓게 펼쳐진 곳에 큰 마을이 나타났다.

곧장 그 마을로 내려가는데 길옆 큰 기와집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다가가 보니 서당이었다.

제법 큼직한 서당 방에서 학동들이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연적을 두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서로 주고받는다.

그 아이들은 여인의 유방같이 만든 물병을 들고 무심히 서로 번갈아가며 벼루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잠시 후 40대로 보이는 훈장이 문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병연을 보더니, 아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오늘은 이만하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훈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학동들은 자기가 쓰던 벼루와 붓, 종이들을 한쪽에 정리한 후 훈장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우르르 몰려나와 각자 집으로 간다.

훈장은 학동들이 돌아가자 문밖에 서있는 병연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네. 지나던 과객인데 학동들이 너무나 열심히 공부를 하기에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병연에겐 아직도 서울 티가 흘렀다.

의상하며 테두리 큰 갓을 쓴 것을 보면 귀한 집의 자제분으로 생각되었다.

"자, 들어오셔서 쉬었다 가시지요."

병연에겐 반가운 말이었다.

그렇잖아도 오랜만에 종일 걸었는데 어느 자리든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 쉬었다 갈까요."

병연은 삼을 삶은 미투리를 벗어놓고 서당 방으로 들어갔다.

병연은 학동들이 정리해놓은 벼루, 먹, 종이, 연적을 둘러보았다.

연적 중 복숭아처럼 생긴 것과 여인의 유방처럼 생긴 연적을 만져보고는 훈장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학동들이 이 연적을 돌아가며 물을 따르던 것이 생각이 나서 외람됩니다만 글 한 수를 써 봐도 되겠습니까?"

"아암요. 되고말구요. 여기 필기도구가 다 있소이다."

병연은 펼쳐놓은 종이 위에 연적(硯適)이라 쓰고 그에 대한 시를 써내려갔다.

何天仙女失一乳  어쩌다 하늘의 선녀가 잃은 젖가슴 하나가

誤落人間文筆房  인간들의 서당 방에 잘못 떨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