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서둘러 청령포에서 나와 관풍헌을 향해 걸었다.

그는 관풍헌으로 걸으면서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같이 자유분방하게 걸어본 것도 처음이다.

지금껏 방구석에 앉아 글공부에 여념이 없다가 간간히 머리도 식힐 겸 집밖을 나와 동강을 걸어보았지만, 오늘의 나들이는 집 앞의 동강을 거닐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관풍헌이 가까워오자 주막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백일장의 결과를 발표할 시각이 임박해오자 하나둘 빠져나와 관풍헌으로 향했다.

병연이도 그들 틈에 끼어 관풍헌의 대문을 들어섰을 땐 백일장을 치를 때보다 사람들이 절반도 못되게 모였다.

아마도 글이 어설펐거나 문장에 자신이 없던 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집으로 향했을 테고, 그래도 글줄이나 쓴다하는 사람들이 모여 초조한 표정을 짓는가 하면, 자신감의 은근함을 지닌 표정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해가 서산마루에 넘으려할 때 시관이 장원자의 명부를 들고 나와 높은 뜰에 우뚝 서서 넓은 마당을 둘러 보았다.

순간 소란스럽던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지며 시관의 발표에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여러 선비님들, 오늘 백일장을 치르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소이다. 그럼 백일장에서 장원하신 분을 호명하겠습니다."

시관은 잠시 장원자의 명단을 재확인하고 나서

"장원 김병연!"하고 외쳤다.

시관은 큰소리로 연거푸 세 번을 불렀다.

장원 자를 발표하자 주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병연은 시관이 장원 자를 처음 호명할 때 들었지만 미동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였던 사람들은 웅성이며 장원 자가 누구인가 두리번거렸다.

"장원을 한 김병연 씨는 대청공당에 원님의 배려로 축하연석을 마련하였으니 속히 당상에 올라와 원님에게 인사를 올리시오."

시관의 말이 떨어지자 병연은 차분하게 군중의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갔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단상으로 오르는 병연에게로 집중됐다.

"아니, 저자가 장원을...?"

"앞날이 창창 하구만!"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젊디젊은 병연은 의젓이 대청공당에 올라 많은 시관들과 유림측의 유지들이 앉아있는 앞쪽으로 걸어서 원님 앞으로 나아가 큰절을 올렸다.

"김병연이옵니다."

"오오! 그대가 오늘 장원한 김병연인가?"

"네. 그러합니다."

"허허, 이 고을에 용이 솟았구먼. 그래 관향은 어디인고?"

"네. 어릴 때 조부님과 부친께서 돌아가셔서 자세히는 모르오나 안동 김가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안동 김씨! 그래 글공부는 누구에게 배웠는가?"
"어렸을 때 옆집에 글 아시는 어른이 계셔서 그때 어깨 넘어로 배운 글을 기초로 하여 지금껏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공부를 익혔습니다."

병연은 간략하게 말했다.

실은 여성하위시대에서 어머님이 글을 가리켜 주었다면 꼬치꼬치 물을 것 같아 적당히 얼버무려 대답했던 것이다.

"오호. 장한지고! 오늘 그대가 쓴 글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과거시험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장원의 글이었구먼."

원님은 만족한 듯이 손등으로 턱수염을 스치고 나서,

"자. 본관이 마련한 이 자리는 오늘 백일장에서 장원한 수재를 위하여 마련한 자리이니 장원 주를 받으라."

원님은 술잔을 들어 병연에게 내밀었다.

그는 원님이 주는 술잔을 받아들자, 가냘프고 나긋한 손가락으로 잡은 백자술병이 향긋한 분 냄새와 함께 병연의 술잔으로 다가왔다.

"축하드리옵니다. 학사님, 장원 주를 따를께요."

병연은 기생이 따라 주는 술을 석 잔이나 거푸 받아 마셨다.

장내는 풍악과 기생들의 춤이 어우러졌고, 시관과 유림측의 유지들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축하연석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병연의 글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가운데 풍악소리와 함께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