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을 보고 닷새 만에 정현덕이 찾아왔다.

그는 글방에 들어와 방안을 둘러 보고 나서 유희가 쓴 '문통'이라는 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병연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번 과거시험을 보셨습니까?"

그의 심상치 않은 물음에 옆자리에서 글을 읽던 복경, 해장, 사수 등 동문들이 병연을 바라보며 그의 동정을 살폈다.

그들도 병연의 과거시험 당락이 궁금하던 터라 소식을 알고 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우전을 바라보았다.

병연은 우전의 눈빛에 시험장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않았느냐, 아니면 답안지를 썼느냐 안 썼느냐 하는 그런 눈빛이 역력했다.

병연은 그에게 엷은 미소를 띄우며,

"과거시험 보러간 사람이 과거시험을 치루지 아니했겠는가. 그 어려운 저승문턱도 생사를 걸고 들어 갔는데, 멍하니 앉았다 나올리는 만무일 테고."

우전은 태연히 대답을 하는 병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과거 급제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명단에 없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해장 신석우가 급히 반문 했다.

"네."

우전의 대답엔 힘이 없었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듯.

"이번 과거에 꼭 급제하시리라 믿었는데....."

"모두가 다 내 글이 부족한 탓이지."

병연은 당연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렸다.

"이번 장원은 서울에 있는 참판 댁 아들이 장원했다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더군요. 그러나 또한 기적은 충청도에서 올라 온 시골 선비가 방안랑(榜眼郞:차석)으로 뽑혔더이다."

"방안랑은 충청도 선비가 뽑혔다고 했는가?"

해장의 반문이었다.

"그렇다니까요. 충청도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지요."

"과체 시에 능한 사람이었던가 보군. 만약 그 선비가 서울에 살면서 어였한 관직에 있는 자제분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장원을 했을 걸세."

신석우의 의미 있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병연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그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네. 광주향반(廣州鄕班)이라 했지?"

복경 안응수의 차디 찬 물음이었다.

향반이란, 시골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양반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네."

병연은 고개를 들고 안응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복경이 새삼스럽게 재확인 하려는 뜻은 시골에서 왔으니까 낙방의 확률이 높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묻는 말로서, 병연에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로서 글방 안의 분위기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앉았던 해장 신석우가 병연의 우울한 표정을 느꼈음인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자자. 과거는 뒷날 또 보면 되는 거고, 다음엔 꼭 급제하리라 믿소이다."

해장은 너그럽게 한마디 하고 책으로 눈을 돌렸다.

병연은 며칠 간 심적 고심에 빠져 헤맸다.

이는 앞으로 과거시험을 또 치러 조상의 이름을 변성명으로 하여 급제한다고 해도 뒷조사에서 들통이 날 테고, 이로 인해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 뻔한 이치였다.

이 모두가 폐족에서 오는 고난과 슬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