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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9-11 12:28
[방조] 24세조 文獻公 約山 炳德(문헌공 약산 병덕)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934  

   

    문헌공 약산 병덕

           (文獻公 約山 炳德)

공의 자는 성일(聖一), 호는 약산(約山). 시호는 문헌(文獻)으로 순조 25년(1825) 병진 9월 13일에 출생하였다.

중시조는 문정공[(文正公) 양관 대제학 좌의정 청백리 증영의정 청음(淸陰) 상헌(尙憲)]으로, 현조는 죽취공[(竹醉公) 우부승지 증찬성 시 충민(忠愍) 제겸(濟謙)]이고, 고조는 좌찬성공[(左贊成公) 증좌찬성 달행(達行)]이며, 증조는 좌찬성공[(左贊成公) 증좌찬성 이경(履慶)]이니, 할아버지는 참판공[(參判公) 이조참판 증영의정 명순(明淳)]이요, 아버지는 충문공[(忠文公) 영의정 봉조하 흥근(興根)]과 어머니 증정경부인 청송심씨의 1남 1녀 중 장남이다.

헌종(憲宗) 12년(1846) 7월 21일 북원(北苑)에서 만배례를 행하고 참반한 유생을 시취할 때 송(頌)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되어 헌종 13년 (1847) 정미(丁未) 23세에 별시(別試)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여 8월 17일 규장각대교(待敎)가 되었다.

철종 5년(1854) 11월 13일 이조참의가 되었고, 이듬해 7월 7일 홍문관부제학이 되었으며, 철종 7년(1856) 6월 25일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10월 24일 직제학이 되었고, 철종 9년(1858) 11월 28일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철종 11년(1860) 8월 10일 정경(正卿)에 발탁 되어 8월 17일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4월 17일 의정부우참찬이 되었고, 철종 14년(1863) 10월 30일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고종 1년(1864) 4월 12일 정헌대부에 가자되어 6월 7일 장원서(掌苑署)제조가 되었다가, 7울 18일 지경연사(知經筵使) 되었고, 12월 12일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이듬해 2월 25일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고종 3년(1866) 2월 28일 사헌부행대사헌이 되었고, 9월 13일 대호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8월 11일 내섬시제조가 되었다가, 12월 30일 행이조판서가 되었고, 고종 5년(1868) 5월 3일 의정부 죄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8월 2일 영희전(永禧殿)제조가 되었으며, 고종 9년(1872) 10월 21일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그 해 12월 27일 돈령부돈령이 되었고, 이듬해 8월 23일 행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고종 11년(1874) 1월 2일 사옹원제조가 되었다가, 1월 6일 내각제학이 되었고, 3월 25일 예조판서를 다시 맡았으며, 7월 12일 지사서지사(知事署知事)가 되었다.

그 날 정사에서 예문관제학이 되었고, 8월 5일 다시 행예조판서가 되었으며, 8월 14일 숭정대부로 가자 되어 9월 20일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11월 27일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12월 6일 오위도총부도총관에 다시 제수 되었으며, 이듬해 1월 1일 세자부우빈객이 되었다.

그 해 6월 6일 형조판서가 되었고, 고종 13년(1876) 윤 5월 27일, 이듬해 2월 19일 판의금부사를 연이어 제수 되었으며, 9월21일 행이조판서가 되었고, 고종 16년(1879) 6월 5일 다시 현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 해 9월 29일 이조판서에 다시 임용되었고, 12월 7일 행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8월 6일 행예조판서가 되었다가, 8월 9일 숭록대부에 가자 되었고, 고종 18년(1881) 12월 8일 평안도관찰사겸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10월 1일 수원부유수롤 옮겼으며, 고종 20년(1883) 1월 13일 독판군국사무(督判軍國事務)가 되어 내직으로 들어왔다.

그 해 3월 17일 의정부우의정이 되어 전환국(典圜局)의 혁파, 해외유학생의 소환 등 수구정책을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듬해 7월 12일 영돈령부사가 되었으며, 10월 2일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고종 22년(1885) 9월 17일 영돈령부사가 되었고, 11월 2일 좌의정에 제수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 해 11월 26일 다시 영돈령부사로 체직 되어 수년간 노병을 이유로 치사를 원했으나 가납이 되지 않아 고종 27년(1890) 12월 14일 선혜청당상이 되었으며, 3월 21일 중비(中批)로 예조판서에 제수 되었다가, 5월 10일 치사하여 봉조하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고종 29년(1892) 임진 6월 22일 향년 68세에 졸(卒)하였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순조 23년(1823)에 태어나, 철종 5년(1854) 7월 27일에 졸하니 애수(哀壽) 32세였다. 아버지는 생원 능직(能直 )이고, 할아버지는 판서 풍지(豊之)이며, 증조는 군수 증판서 구(銶)이니, 외조는 김두칠(金斗七)로 본관은 광산이다.

후배(后配)는 정경부인 전주유씨로 헌종 2년(1836)에 태어나, 고종 20년(1883) 2월 16일 48세에 졸하였다. 아버지는 현감 성(誠)이고, 할아버지는 직양(直養)이며, 증조는 성집(成集)이니, 외조는 강시회(姜時會)로 본관은 진주이다.

슬하에 무후하여 노가재공 창업(昌業)의 6대손 생원 병용(炳龍)의 2남 호조참판 종규[(宗圭 = 구휘 조균(祚均)]을 계자하여 후사를 이었다.

공과 배위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문촌(問村) 을좌신향(乙坐辛向 : 서북향)에 합폄이고, 후배의 묘소는 동강(同岡 = 같은 언덕) 좌록(左麓) 을좌신향(乙坐辛向 : 서북향)에 있다.

저서로는 《속간고 續諫考》가 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金甌錄 梅泉野錄 安東金氏賢人錄(2011) 자랑스런永嘉後裔(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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