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Contact Us
    자유게시판
    종회활동
    동영상자료
    사진 자료
    자 료 실
방문자
231
319
3,628
718,231
 
>> >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작성일 : 10-01-29 09:43

조선 왕능과 왕비능 (3). 貞陵정능 (태조비 康妃 강비)
 글쓴이 : 김관동
조회 : 1,911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 40基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③

 

태조계비 신덕고황후 정릉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의 묘 앞에 설 때마다 별의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임금이 묻힌 왕릉에서부터 영의정 판서 등을 지낸 고관대작, 풍전등화 같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장군, 간교한 세치 혀를 잘못 놀려 무고한 인재들을 죽게 한 희대의 간신, 국권을 넘겨주고 당대의 일신영달에 눈 멀었던 매국노-. 심지어는 일생을 종노릇하다 섬기던 상전 앞에 묻힌 노비와 살아생전 타고 다니던 말과 소 무덤도 있다.

이들 망자(亡者)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기록된 바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연히 살다간 선인들 무덤 앞에서는 정중한 예의를 갖추게 되고, 시류에 영합하며 막행막식한 소인배들한테는 안타까운 탄식뿐이다. 후손들에게 짐을 주지 않고 본이 되도록 살아야 하겠다는 자기성찰과 함께 역사는 참으로 준엄하고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누구나 갖게 되는 인지상정이리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번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아리랑 고개로 진입하면 바로 ‘정릉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좌우의 상점들과 아파트의 좁은 길을 가다보면 막다른 길목에 이르는데 이곳이 세계문화유산 정릉(貞陵)이다. 29만 9,574㎡(90,621평)의 사을한(沙乙閑) 산록에 단릉(單陵)으로 조성된 이 능은 태조 이성계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계비 강(康)씨가 영면해 있는 곳으로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정릉을 다녀오면서 북한 개성시 상도면 풍하리에 있는 제릉(齊陵)을 지나칠 수가 없다. 태조의 원비 신의고황후 안변 한씨 능으로 지금은 갈수 없는 땅이다. 원비 한씨(1337~1391)는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태조가 벼슬하기 전 시집와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의 여섯 왕자와 경신 경선 공주를 낳았다. 태조보다 두 살 아래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1년 9월 23일 55세로 승하했다.

계비 신덕고황후 신천(또는 곡산) 강씨는 황해도 출신으로 당시 권문세가였던 판삼사사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태조의 등극거사에 직접 참여했고 조선 개국 후에도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자 방번 방석(초봉세자)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나 원비의 다섯째 왕자 방원(정안대군)과의 정적관계로 후사마저 끊기게 된다. 개국 초 조선천지를 뒤흔든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여기서 계비 강씨의 생몰연대에 대해 새롭게 밝혀 둘 것이 있다. 지금까지 다수의 역사기록에 그의 출생연도가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는 고려 공민왕 4년인 1356년(병신) 6월 14일 생이었다. 태조보다 21세 연하로 1396년 8월 13일 41세를 일기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같은 사실들은 전주이씨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보감 등에 밝혀져 있다.

개국 초 조선왕실의 권력구조는 난마같이 얽혔다. 원비 한씨의 장성한 여섯 왕자가 있었지만 계비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실 대통을 이으려 했다. 이에 동조한 것이 신권주의(臣權主義․지금의 내각책임제와 유사)를 부르짖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등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데 목숨을 걸었던 정안대군이 크게 반발했고 왕위계승에 은근히 뜻을 두었던 넷째왕자 방간도 술렁였다. 끝내 태조가 11세의 어린 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안대군은 속이 뒤집혔다.

이런 판국에 계비가 돌연사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사후 뒷일을 알 바 아니겠지만 이후 자신의 소생은 물론 자신을 따르던 아까운 인재들도 몰살당했다. 뒤늦게 안 태조가 땅을 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계비를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곳(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장사지내고 정릉이라 능호를 내렸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도 죽으면 함께 묻히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릉은 왕릉치고는 초라한 무덤이다. 능을 감싸는 병풍석과 난관석도 없고 석물들도 초라하다. 태종으로 등극한 정안대군이 정릉을 여러 차례 이장하면서 정자각을 헐어버렸다. 석물들은 실어다 광교 돌다리로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즈음 아무렇게나 옮겨 쓴 자리가 현재의 정릉이니 오죽했겠는가. 풍수에 능한 태종이 미워하는 계비 묘를 명당에 잡을 지관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8년(1669) 우암 송시열의 상소로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정릉은 촌부의 무덤만도 못한 잊혀진 폐묘였다.

왕실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호(號)를 내렸다. 묘호(廟號)는 임금이 승하한 후 조정대신들이 지어 바친 것으로 태조, 세종, 영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왕 자신들도 살아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려 사후에 지어올린 것으로 왕비는 휘호(徽號)라 했으며 종묘(宗廟)에 모셔진 신주에 새겨져 있다. 정릉, 태릉, 홍릉 등은 능호(陵號)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시호(諡號)는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한테 내리는 칭호로 충무공, 문정공 등이며 문중의 영광이었다.

조선 능제(陵制)의 구분은 능의 배치에 따라 달랐다. 왕과 왕비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능을 단릉이라 하고 쌍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를 나란히 모신 형태를 일컫는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를 배치한 경우는 삼연릉으로 부르고 동원이강릉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한 경우로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왕실 묘제다. 우상좌하(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라는 유교예제도 눈여겨 볼 문화유산이다.

능상에 올라 나경으로 좌향을 재보니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나경은 24방위로 나뉘어 있으며 1방위가 15도 씩으로 360도 원을 이루는 풍수전문가의 나침반이다. 정릉은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 안으며 좌측에서 물이 내려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우도(左水右倒)의 국세다. 산정기를 능으로 밀어주는 입수(入首)용맥이 갈라져서 능 앞의 바람을 막아주는 안산(案山)이 형성되지 못했다. 좌청룡이 내려와 작국(作局)한 금대국세(金帶局勢)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벼슬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여자와 재물을 상징한다.

태조가 강씨 부인을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물 한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는 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연유를 물으니 “급히 물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계비 강씨다.

신덕왕후라는 휘호를 되찾아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이때의 비를 원을 씻어주는 비라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고황후는 후일 고종황제가 추존하여 올린 호다. 정릉 기신제향(忌辰祭享)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매년 9월 23일 올리고 있다.

                              <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




(아래 글과 사진은 본회 월보 김관동 사무국장이 필자와 동행하여 촬영한 게재물입니다.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2010. 1. 16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 - 16에 있는 태조계비 강씨능을 찾았다.

태조 이성계로 부터 끔찍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장부 康氏(강씨)이다. 말년에 개국공신 정도전과 뜻이 맞아 범떼 같은 정실 韓氏(한씨)의 여섯대군을 물리고 자신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니 생몰연대 조차 모르는 실정으로 한생을 마감했다.













御道(어도)

왼편이 높아 왕의 길이고 오른쪽의 낮은길은 세자인 東宮(동궁)의 길이다.

이 길은 평인이 가서는 절대 않되는 길임을 이런 기회에 알아 주길 바람







능 앞에서 내려다 본 전경





長明燈(장명등) 



능 앞의 魂游石(혼유석)

일반인은 床石(상석)으로 바로 뒤에 작은 상의 혼유석이 있으나 제왕의 능은 상석이 없고 혼유석만 존재함.



혼유석 밑에 받침대에는 귀신의 형상을 한 얼굴이 새계져 있음



장명등 사이로 능침의 좌향을 봐야 정확하다고 함





일반인의 山神石(산신석)은 묘 위에 있지만 능에는 산신석이 정자각 옆  밑에 있음



高宗(고종) 때 세워진 神道碑(신도비) 



능 옆에 있는 작은 점포로 박수 무당이 살고 있는데 그 기력과 담력이 대단하여 아무도 제재를 못하고 있음 



禁川橋(금천교)로 일반인은 이다리를 건널수가 없으며 제주와 그 관계자만 건널 수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