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비추 (萬里悲秋)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바람 급해 하늘 높고 잔나비 파람 슬픈데,

渚清沙白鳥飛回(저청사백조비회)

물가 맑아 모래 흰 곳 새들 날아 돌아오네.

無邊落木蕭蕭下(무변락목소소하)

가없이 지는 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부진장강곤곤래)

다함 없는 장강은 넘실넘실 흘러온다.

萬里悲秋常作客(만리비추상작객)

만리에 가을 슬퍼 늘 나그네 되었으니,

百年多病獨登臺(백년다병독등대)

백년 인생 병 많은데 홀로 대에 오르누나.

艱難苦恨繁霜鬢(간난고한번상빈)

고생으로 터럭 셈을 괴롭게 한하노니,

潦倒新停濁酒杯(료도신정탁주배)

쇠한 몸 탁주 술잔 새롭게 멈춘다네.”

두보의 절창 ‘등고(登高)’ 전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람이 빠르고 하늘이 높고 잔나비 파람(휘파람) 슬프니”로 풀이한 ‘두시

언해’를 통해 배웠다.

안록산의 난 이후 기주(夔州) 땅에 피난 가 살 때, 9월 9일 중구절(重九節)을 만나 높은 곳

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다.

3, 4구의 풍경은 이상하게 오래 생생하게 남아 있다.

5구의 ‘만리비추(萬里悲秋)’는 만리 떨어진 타향에서 가을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가을 바람에 우수수 잎이 진다.

좋은 절기를 맞아 병든 몸을 끌고 누대에 올라, 그래도 한잔 술로 시름을 달랜다.

탁주 한 사발을 따라서 마시려다, 당기던 술잔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누구냐?

여기는 어디냐?

김안로(金安老·1481~1537)는 시 ‘석망(夕望)’에서 이렇게 읊었다.

“作客悲秋更病哉(작객비추경병재)

나그네로 가을 슬퍼 게다가 병 앓으며,

愧無佳句獨登臺(괴무가구독등대)

좋은 시구 없이 홀로 누대 오름 부끄럽다.

漾空雲影波銜去(양공운영파함거)

넓은 허공 구름 그림자 물결 물고 흘러가고,

排箔山光鳥帶回(배박산광조대회)

주렴 걷자 산 빛을 새가 이고 돌아오네.

平歲烏蟾常恨疾(평세오섬상한질)

평시엔 세월 항상 빨리 감을 한하더니,

危塗鬢髮不嫌催(위도빈발불혐최)

위급한 길 터럭 셈을 재촉함도 혐의찮네.

江湖暮意多搖落(강호모의다요락)

강호의 저무는 뜻 영락함이 많아서,

古木荒城日自頹(고목황성일자퇴)

황량한 성 고목 위로 해가 홀로 기우누나.”

1, 2구는 두보 시의 5, 6구를 점화했다.

고단하던 시절이었던 듯 5, 6구에서, 평소 같으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감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나, 이제는 터럭이 빨리 셈이 싫지가 않다고 했다.

가을볕에 황량한 옛 성 너머로 또 하루 해가 진다.

고향을 갈 수 없는 실향민들에게 만리비추의 망향정(望鄕情)이 깊어지는 시절이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21.09.23 03:00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