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서책들을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벽장 안에 쌓인 책들을 둘러보았다.

더욱이 희귀한 서책은 물론, 보고 싶어 했던 책들이 눈앞에 나타나니까 그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설레었다.

제자백가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 주희(朱喜)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 이덕형의 한음문고(漢陰文稿), 이색의 목은문고(牧隱文藁), 이율곡의 성학집요(聖學輯要), 이황의 퇴계전서(退溪全書), 홍만종의 시화총림(詩華叢林) 이외에도 한중 서적들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집에서 읽던 책들도 거의가 이곳에 있었고, 보고 싶었던 책과 알고 있지 않았던 책들이 많아 글밖에 모르던 그에게는 황금과 같은 서고였다.

"정말 귀한 서책들입니다."

귀한 책들이지요. 선대에서 부터 지금까지 모아오신 책들입니다. 벽장 밖에 있는 서책은 이곳으로 공부하러 오는 친구들이 가져온 책도 있는데 그중 해장, 사수 형제가 가져온 책이 더 많은 편이지요."

"네. 그러하군요."

병연은 대답을 하면서도 그 많은 책들을 살피느라 그의 눈은 벽장 속에 쌓인 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안응수는 그러한 병연을 보고,

"이명 씨에게 필요한 책이 있다면 언제든지 여기 진열된 책을 꺼내 보십시오. 여기 오는 친구들도 필요할 땐 벽장 속에 있는 이 책들을 탐독하지요."

"필요하다 뿐입니까. 벽장 속에 있는 서책들은 모두가 귀중한 보물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탐독하겠습니다."

병연은 말을 끝내고나서 쌓여있는 서책들을 둘러보다가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이는 이수광(1563~1628)이 쓴 지봉유설이었다.

그는 책이 든 벽장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방 한쪽에 놓인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이를 본 안응수는 병연의 옆에 벼루와 먹, 붓과 종이를 갖다 놓아 준다.

병연에겐 너무나 분에 넘치는 대접이었다.

안응수도 방에 놓인 책장에서 책을 꺼내들고 건너편 책상으로 가서 앉아 책을 펼쳤다.

병연은 책을 두어장을 넘겼을 즈음 문이 열리며 해장 신석우와 그의 동생 사수 신석희가 들어왔다.

그들은 구면으로 인사를 하고, 벽장서고로 가던 신석우가 병연이 읽고 있던 책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한다.

"역시 시인은 속일 수 없소이다. 그 방대한 지봉선생의 글 중 문장 편을 탐독하시니....."

병연은 해장의 말에 그를 쳐다보며 미소로 응대했다.
해장의 말은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고 구면으로서의 친근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봉유설은 광범위하고 방대한 글로 20권 10책으로 이수광이 편찬한 책이다.

그중 8권에서 14권은 문장(文章)으로 되어있어 문장으로 된 책을 가져다 보는데 신석우, 신석희가 글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석우 형제는 병연의 좌우 옆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이는 시문에 능한 병연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였다.

훗날 이 두 형제의 행적을 살펴보면, 신석우(申錫愚 1805~1865)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평산(平山), 석희의 형이다.

183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838년 용강 현감(龍岡縣監). 그 후 교리(校理). 병조참판. 승지, 1847년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했다.

1850년 대사간. 이조참의. 승지. 이조참판 등을 거처 1855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1857년에는 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형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게 북경이 함락당한 때였으므로 귀국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에 큰 참고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석희(申錫禧 1808~1873)의 자는 사수(士綏), 호는 위사(韋史), 본관은 평산(平山). 영(令) 벼슬로 재직 중 1848년 증광 별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1850년 황해도 암행어사를 거쳐, 규장각 직각. 도청 응교(都廳應敎) 등을 역임, 1854년 순천부사.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 이조참판. 황해도 관찰사. 예조 판서. 한성부 판윤. 1863년에 형조 판서. 1864년 실록 교정청의 당상이 되었고,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 예조판서. 수원 유수 등을 역임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병연은 서울에 온 지 두 해가 되도록 안응수, 해장 형제와 같이 거의 날마다 안응수의 별채인 글방에 모여 시문을 논하며 공부에 몰두했다.

특히 과체 시에 노력하면서 수십 편의 과시를 썼다.

글방에 있는 벽장 속의 서책들은 모두 탐독했고, 그중 제자백가에 집중하다가 며칠 전에 유희(柳僖 1773~1837)가 쓴 문통(文通)이란 책을 해장이 가져와 탐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