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과거장으로 몰리는 군중들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왔다.

이는 선인(先人)들의 상소문이나 그의 문집에 기록한 과거시험의 폐단에 대한 글들이 그의 뇌리에서 살아나 확대되어 왔다.

이에 관한 글로는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박지원(朴趾源,1734~1850)의 ≪하북린과(賀北隣科)≫, 박제가(朴齊家,1705~18?)의 ≪북학의(北學議)≫, 정약용(丁若鏞,1762~1805)의 ≪하일대주(夏日對酒)≫, 그리고 이형하(李瀅夏)가 1818년(순조18)에 과거의 폐단에 대해 몇 가지 형태의 부정행위를 지적하여 올린 상소문 등의 글이 앞서가는 패거리들에게서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들 일행이 광통교를 건너서니 과거장으로 가는 인파들이 점차 길을 메워갔다.

병연은 이를 악물고 집 앞에서 만난 무리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들 무리들도 중도에서 만나 서로 바라보며 눈을 맞춘지라 그들도 따라오는 병연을 따돌리지 않고 순순히 받아주는 눈치였다.

"노형은 과거시험이 처음이 아닌 것 같소이다."

한 무리의 뒤에서 거추장스런 도포와 당혜를 신은 자가 병연에게 말을 건네왔다.

실은 그가 안응수의 집을 지날 때 병연이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도포와 당혜보다 낮은 두루마기와 미투리를 신고 들메를 한 것은 과거장에서의 혼잡함을 경험하여 간편한 옷을 입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웬걸요. 과거길은 초행이올시다."

병연은 대답을 하고나서, 이토록 여러 명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그 집의 권위가 궁금하던 터라,

"노형의 춘장님께선 높은 관직에 계시나 보옵니다?"

"네. 그렇소이다. 지금 참판으로 계시옵니다만, 노형의 춘장님께선 어느 벼슬에 계시온지요?"

병연은 그의 반문에 조금은 당황했으나,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그들이었기에 얼굴표정을 굳히며 복경 부친의 관청을 떠올렸다.

"네. 지금 승정원 어른으로 계시옵니다."

병연의 말에 그들 일행의 표정이 달라졌다.

승정원의 어른이라면 그 당시 왕명을 받들어 거행하는 관청의 어른으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직위였다.

"지체 높으신 어른이십니다. 오늘 함께 모실 터이니 우리 일행을 따르십시오."

병연은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빌미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선접꾼을 얻은 셈이었다.

앞서가던 일행의 주인은 병연에게 친근함을 보이면서, 지체 높은 자제로서 도포보다도 간편하게 입은 두루마기와 미투리에 들메를 한 병연의 차림새에 부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병연은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이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두루마기의 양쪽 도련의 끝을 잡고 허리께로 접어 올려 양 도련의 끝을 허리에 잡아 매었다.

걸음걸이는 한결 가벼웠다.

그들 일행이 창경궁 후원의 후문께로 접근했을 때는 무수한 인파가 몰려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소인의 뒤를 바짝 따르십시오!"

앞선 선접꾼의 말이었다.

선접꾼 두명은 각자가 한 손에는 휏불을 높이 치켜들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는가하면 앞 사람의 엉덩이와 등짝을 마구 찔러대며 밀고 나갔다.

그때 저만치 보이는 창덕궁 후문이 열리고 있었다.

순간 고함소리와 비명이 뒤엉킨 문에서는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수많은 휏불이 출입문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불화살이 그곳을 향하여 날아가는 그런 형상을 보는 듯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들어가는 선접꾼의 뒤를 따르며 죽을힘을 다하여 뒤따르던 병연은 갑자기 연암(燕巖)이 쓴 하북린과(賀北隣科)에서 과거시험장에 얽힌 사연의 글이 생각났다.

명문가의 연암이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했다가 짓밟혀 죽을 고생 끝에 결국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후 이웃에 있는 합격자에게 보낸 축하편지의 한 구절이다.

"시험장 문에 들어가느라 서로를 짓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무수했고, 형제들끼리 부르며 찾아다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나면 손을 잡고서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만난 듯 했는데, 이런 경우는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해도 되겠지요.
 지금 그대는 열에 아홉까지 갔던 저승 문턱에서 벗어났고, 게다가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 열에 아홉은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드립니다.
 찾아뵙고 축하드려야 하겠지만 저 역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뒤라 지금 자리에 보전한 채 신음하고 있으니 무심함을 용서하십시오."

박지원은 이 시험에서 낙방한 후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연암 골에 들어가 처사로만 지내며 학문에 몰입하여 많은 저서를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