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족!"
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의 절규였다.
그는 안방 벽에 비스듬이 앉아서 어린 병호가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옆에서 겁에 질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병하와 병연이를 바라보다가 무엇에 놀란 듯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고 황급히 일어나 대청마루로 나갔다.
밖은 어둠이 깔렸고, 넓디 넓은 대청마루 구석진 곳에서 덩그러니 촛불 하나가 깜빡이며 주위를 밝히고 있을 뿐, 넓은 대청마루엔 을씨년스러운 냉기만이 그의 피부를 할퀴었다.
그는 대청마루 한쪽에 우두커니 선채 다시 한번 '멸족'을 되씹어 보았다.
그럴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 짖눌리고 숨이 헉헉 막혀왔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제안대로 끝까지 남아서 시중을 들어주는 충복 두 연놈에게 후덕을 베풀어주고, 병하와 병연이는 곡산에 있는 종복 김성수의 집으로 피신시키자는 제안을 받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는 조용히 대청 문을 열고 칠흙같이 어두운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 건너편에 있는 행랑채에서 희미한 불빛만이 종복인 덕삼이의 방임을 알리는 듯 새어나오고, 온종일 찌뿌렸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보름 전만해도 이집에서 부리던 종복들이 많아 적지 않은 행랑채에도 불빛이 환하게 새어 나왔고, 안채와 별채, 행랑채는 물론 큰대문과 중문, 솟을대문에도 장명등이 켜있어 담장 안은 온통 대낮같이 밝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던 선천에서의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김병연의 집은 몰락해갔다.
며칠사이 그 많던 종복들이 하나둘 모두 도망쳐 갔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던 덕삼이와 여종인 언년이만 남았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절간처럼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은 하루하루가 무서운 침묵으로 덮쳐왔다.
요사이 두 내외는 곡산에 있는 종복 김성수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는 선천과 양주땅의 회암리 본가를 오가며 모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충성스러운 종복이었다.
그는 김병연의 할아버지가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선천과 양주를 오갈 때 중간지점인 황해도 곡산에 땅 대여섯 마지기와 집을 장만해 이곳에 있던 여종복과 짝을 지어줘 그곳에서 살게 했다.
김성수는 지금껏 선천과 양주를 오가며 충실히 심부름을 해왔고, 그가 이곳을 다녀간 지도 달포가 넘도록 오지를 않으니 여느 때와 달리 절박한 심정으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안근은 어둠속의 대청 뜰을 서성이며 결심이나 한 듯 마당건너 행랑채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불빛을 향해 입을 열었다.
"덕삼이 방에 있느냐?"
잠시 후 덕삼이가 문을 열고 성급히 행랑채 뜰에 나와 칠흙같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다가 대청뜰에 서있는 주인을 보고는 성급히 달려나와 허리를 굽히며,
"네, 새서방님. 지를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할 말이 있으니 지금 안방으로 들어오너라"
덕삼이는 새서방님의 말에 대답을 하고 잠시 멍하니 흰 눈이 내리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혹시나 나를 내쫓으려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대청마루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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