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아들놈은 사람은 다 같은 것인데 학문만 많이 익히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으로 믿은지라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러면 문관 벼슬은 지체가 높아야 된다면 누구보다 굳건히 무술을 익히면 굳센 장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어 무인(武人)으로 바꾼다.

"이재 이 자식은 큰 활을 당길 수 있고

무술이 극곡과 같이 익혔으니

원컨데 오영(五營)의 장수가 되어

말 앞에 대장기를 꽂으려 합니다."

그 애비가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대장의 수레도 타게 않는단다."

문관도 무관도 다 쓸모없는 아비의 답이 한결 같아서 애간장이 끓는 아들놈은 직책을 낮추어 묻기를 반복한다.

"이 자식 지금 관리 사무를 익혀

공황의 뒤를 이을 만 하오니

이재는 군부(郡符)를 허리에 둘러차고

원 없이 호의호식 즐겨 보렵니다."

그 애비가 하는 말,

너는 지체가 낮아

순리(循吏)도 혹리(酷吏)도 될 수 없단다."

아비의 답변에 실망한 자식은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며 책이고 활이고 모두 집어 던지고 쌍륙놀이, 골패놀이, 공차기 놀이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시골구석에서 늙도록 파묻혀 버린다고 했다.

그러면 권세 있고 부호 집 자식은 어떠한가.

병연은 다산의 시를 더듬는다.

객들 말이 너는 걱정 없다.

너의 집은 하늘에서 복 내린 집

네 관직도 하늘이 정해 놓아

청관(淸官)요직 원대로 할 수 있는데

부질없이 헛고생 해가면서

일과 삼아 글공부 할 것 없고

때 되면 좋은 벼슬 저절로 생기는데

편지장이나 쓸 줄 알면 족하리라.

두 집 자식의 결과는 같다.

농사꾼의 자식은 '공부해도 안 된다'와 세도가의 자식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 없다'로 이어져 권세가의 자식도 더 이상 공부 안 해도 벼슬은 저절로 굴러 오는 것이니 책과는 거리가 멀어져 온갖 놀이에 끌리어 인재가 못되고 만다.

권세 있는 자와 평민의 현실을 정면에서 다산은 타락한 신분제도와 과거제도로 서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꼬집었다.

재주가 뛰어나고 머리를 싸고 학문에 열중한다 해도 지체가 낮아 이미 출세의 길은 막혀있어 원하는 인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길은 호의호식에 놀고먹으며 책 한번 제대로 펴보지 않은 세도가의 자식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위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속만 타기에

또 술잔을 들어 마신다네.

이는 다산의 기나 긴 장편 시의 끝 구절이다.

한 여름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유배지에서 견디기 힘든 마음을 달래며 간간히 술을 마셔가며 쓴 시이다.

병연이도 술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야만 이 답답한 마음의 상처를 잊고 깊은 잠속에 푹 빠질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