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부모가 다 생존하신 것을 구경(具慶)이라 한다.
경사를 갖췄다는 뜻이다.
부모가 사는 집을 구경당(具慶堂)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느덧 구경의 행복을 누리는 친구를 찾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부친만 살아 계신 것을 엄시(嚴侍), 모친만 살아 계신 것을 자시(慈侍)라 한다.
양친이 다 돌아가신 것이 영감(永感)이다.
영원히 슬픈 일이라는 뜻이다.
흰 구름(白雲)이나 학의 머리(鶴髮)도 연로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말이다.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 시 중에
"慈親鶴髮在臨瀛 학의 머리 되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 지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라는 구절이 있다.
'당서(唐書)' 적인걸(狄仁傑)전에는 적인걸이 태행산(太行山)에 올라가서 하양(河陽)을 내려다보며
"내 부모님이 계신 곳이 저 구름 아래다"
라고 말하자 흰 구름이 옮겨가서 하양을 보다 자세히 볼 수 있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흰 구름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뜻으로 전이되었다.
한겨울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뛰어올라 계모에게 바쳤다는 진(晉)나라 왕상(王祥)과 한겨울 대숲에서 죽순을 얻었다는 맹종(孟宗)의 이야기는 동양 사회에서 유명한 효도이야기다.
'나무에 부는 바람(風樹)'도 효도에 관한 말이다.
한(漢)나라 한영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은 모시고 싶어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파리 머리처럼 작은 글자도 읽는다는 '승두세자(蠅頭細字)'는 노익장의 뜻으로도, 어버이의 건강을 기뻐하는 뜻으로도 쓸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편찬한 '신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각 지역 효도(孝道) 인물을 보면 양반 사대부 못지않게 사노(私奴)·사비(私婢)들의 효행 기사가 많다.
자신을 종으로 태어나게 한 어버이에 대한 효도는 감동과 슬픔을 함께 준다.
한 백화점에서 연인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 화이트데이에 대한 느낌을 조사했더니 '어머니의 흰 머리' 등 가족에 대한 답변이 의외로 많았다는 소식이다.
오늘 화이트데이가 한국에서는 효도의 날, 가족의 날로 정착한다면 외래문화 주체적 수용의 좋은 예가 될만하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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