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皐詩選(43) 怪僧淫談( 괴승음담)

못된 중이 사대부집 부인을 범하려다가 오히려망신만 당하고 돌아선 이야기.

여인의 재치와 기개가 대단하다. 

늦은 밤에 산속을 지나던 김삿갓은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목격하게 되었다.

여인은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는지 연신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며 걸음 재촉하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단정하게 장옷을 걸치고 있는 품이 부잣집 마나님 같아 보였다.

김삿갓은 얌전한 여인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 떼라도 만나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싶어 살살 뒤를 밟았다.

얼마쯤 가다가 여인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같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인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중이었다.

여인의 말이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스님, 왜 하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런 산속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혹시 남이 볼까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여인은 아마 자신이 다니는 절의 중을 만나고 있는 듯했다.그런데 여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중이 한 행동을 보고 김삿갓은 하마터면 헉,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못된 중놈이 갑자기 여인이 손목을 덥석 잡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안 보는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서니 뭐가 잘못 됐다는 말이오. 

나는 이미 부인을 범하기로 마음을 먹었소.”

기가 막힌 일이었다. 

평범한 속인이라도 남의 집 부인을 넘보면 경을 칠 노릇인데 하물며 불도를 닦는 중이 그런 말을 하다니. 김삿갓은 당장 뛰어나가 지팡이로 중놈의 머리통을 후려칠까 하다가 꾹 참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찌 일시적인 사념으로 그 동안 공들여 쌓아 오신 업을 무너뜨리고 파계를 자처하십니까?”

여인은 완강히 중을 거부했으나, 그 중놈은 한번 일어난 욕심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그대를 범하기로 작정했소. 정 그렇다면 우리 내기를 해서 결정합시다.”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남녀의 육체관계를 어찌 내기 하나로 결정한다 말인가. 

하지만 막무가내로 나오는 중의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겁탈을 당할까 봐 겁이 났는지 결국 여인은 중의 말대로 내기에 응하고 말았다.

중이 말하는 내기도 희한한 것이었다. 

1부터 10까지 각기 첫자를 시작으로 하여 시를 지어보자는 것이었다.

먼저 못된 중놈이 시를 읊었다.

일 : 일룡사에 사는 중이

이 : 이룡사로 가는 중에

삼 : 삼거리에서

사 : 사대부 가문의 부인을 만났네.

오 : 오음(五陰)이 이제는 통하지 않아

육 : 육효(六)로 점을 치니

칠 : 칠괘(七掛)도 좋지만

팔 : 팔괘(八掛)는 더욱 좋구나.

구 : 굽어라.

십 : X 좀 하자.

오음이란 불교에서 정신과 물질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하는데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나 저나 중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음탕한 것이었다.

중놈은 이제 자기 욕심을 채우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를 지을 자신이 없으면 그냥 내 품에 안겨도 좋소.”

그 순간 여인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보자 보자하니 음탕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내 이제 너를 불자로 보지 않을 것이니 지금부터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잘 듣거라.”

여인의 호통이 얼마나 서슬 같은지 김삿갓도 등이 오싹했다.

이내 여인은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일 : 일편단심의 마음을 버리고

이 : 이심(二心)이 되라 하니 될 소린가.

삼 : 삼강(三綱)이 버젓이 살아 있고

사 : 사리(事理)가 분명하게 있거늘

오 : 오할(五割)을 해버릴 이 땡중놈아

육 : 육환장(六環杖, 지팡이) 길게 짚고

칠 : 칠가사(七架裟, 승복) 둘러 입은 채

팔 : 팔도(八道)를 돌아다니며

구 : 구하는 게 겨우

십 : X이더냐!

어디에 그런 추상 같은 기개가 숨어 있었는지 여인의 음성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도 계속 치근댄다면 그 중놈은 사람도 아닐 것이다. 

만약 그토록 수모를 당하고도  여인을 겁탈하려 든다면 이번에는 정말 김삿갓이 지팡이를 꼬나 쥐고 나설 참이었다.

그래도 중놈은 사람의 탈을 쓴 까닭에 한마디 지껄이고 등을 돌렸다.

“천하에 너처럼 무서운 계집은 다시 없을 것이다.”

중놈이 도망가자 여인은 장옷을 고쳐 입고 아까 오던 길로 돌아갔다.

‘내가 오늘 참으로 기개가 높은 여인을 만났구나.’

김삿갓도 그렇게 중얼거리며 길을 떠났다.

-김삿갓 이야기 중에서-